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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대해: Machulp을 중심으로

데시카 2010. 7. 29. 18:01
(2010.7.29)
지난 주말에 지식이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독서를 했습니다. 독서를 마친 뒤에 바로 느낌이나 생각을 정리해 두는 게 좋은데, 그만 시간이 없어서 며칠이 되니까, 주제가 낯설게 다가옵니다.

제가 지식이라는 것에 대해 최근에 많은 관심을 갖는 것은 3가지 정도의 이유가 있습니다. (1) 먼저, 무엇보다도 지식기반사회에서 지식이라는 무형의 자산(stock)이자 유량(flow)은 부와 경쟁력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지식을 교양이나 인문적 소양이라고 생각했던 시기도 있지만, 지식 그 자체가 경제재로서 투입과 산출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2) 지식 자체의 성격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죠. 대체적으로 지식에 대해 관심을 가질 때는 과학에 많이 초점을 두는 경향이 있었죠. 인문학 같은 지식은 개인의 교양으로 여기는 면도 있었구요. 그런데, 지식기반사회가 심화되면서 과학 못지 않게, 인문학 지식 역시 중요하게 부각됩니다. 전자과학기술에서의 극소혁명 시기에는 과학이 주목할 만했죠. 하지만 요즈음엔 사람들이 관심을 안두죠. 어차피 과학기술의 공급은 과잉되어 있거든요. 그러면서 주도권은 소비자에게 넘어갑니다. 그래서 소비자와 제품 또는 기술이 대면하는 지점 즉 인터페이스가 중요해지죠. 이러한 인터페이스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인터페이스의 한 축인 인간 그리고 사회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합니다. 그래서 종래 공급자 중심인 분과학문적 전문지식에서 수요자지향적인 통합적 지식이 요구되는 것이죠. (3) 한국에서의 지식의 빈약함의 문제죠. 한국은 분과학문적 지식이나 통합적 지식이나 모두 취약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합학문체제에서 분과학문으로의 전문화과정이 없이, 한국에서는 이전의 지식체계를 무너드리고 들어온 분과학문체제가 자리잡죠. 그러다보니까, 학문이 기반하는 구체적 한국 사회에 대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통합적 접근과 분과학문적 접근이 이루어지지를 못하고 서양의 가설(즉 문제의식)과 방법론을 수입해서 쫓아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죠. 이렇다보니까, 여전히 지식의 추격자일뿐 breakthrough를 하지는 못하고 있죠. breakthrough는 현실문제의 인식과 해결에서 비롯하는 것이니까요. 서구에서도 학문의 전문화체제에 따른 소통의 결여는 문제로 제기되지만 (C.P. Snow의 <Two Cultures>), 그럼에도 서양은 오래된 통합학문적 전통과 교양이 내려오고 있죠. 그래서 분과학문에만 함몰되지 않고, 통합적 비전을 제시하면서도 분과학문과 소통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 풍부하게 존재합니다. 한국은 이러한 기반이 취약한 것이죠. 더군다나, 한국은 과거의 학문(다분히 인문학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유학기반의 전통)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공격하면서 서양의 과학이 자리하는 과정에서 인문학적 기반이 아주 취약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학문의 수준도 문제이지만, 학문체계도 불균형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지식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 지식이라는 것이 워낙 방대할 수밖에 없어서 일정하게 그 지식을 논하는 목적과 그에 따른  범위을 정의하고서 논의를 시작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물론 이렇게 정의한 목적과 범위가 한계를 갖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지식에 대한 영양가 있는 성과가 창출되겠죠. 다양한 목적과 범위에 따라 각각 논의성과가 만들어지면 이런 것들이 집합적으로 모여서 의미있는 성과를 구성하겠죠.

저는 지식에 대해 이루말할 수 없는 애정과 흠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실용성 여부와 저의 이해가능성을 차치하고 지식이란 저에게 있어서 판타지라고 할 수 있죠. 나중에야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그래서 너무나도 서글프지만), 항상 도서관에 있는 책은 다보겠다는 생각을 품었었죠. 이러한 저의 지식에 대한 산만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제가 논의를 하기 위해서는 저는 지식은 현재 또는 잠재적인 경제재로서의 의미를 갖는 지식입니다. 저에게 있어서 지식론의 목적은 경제적인 것이고, 그러한 기준에 따라 관심을 두는 지식의 범위가 정해지는 것이죠. 이렇게 원칙적인 선언을 해도 그 구체적인 목적과 범위는 애매하기 그지 없죠. 더군다나 "잠재적"이라고 하면, 여전히 많은 지식이 그에 해당할 수 있고, 또한 앞으로 만들어질 새로운 지식들도 포함되겠죠. 

이렇게 지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저의 문제의식과 통하는 연구자와 저술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 발견했어요. Fritz Machlup(1952-1983)이라는 오스트리아 출신 미국 이민자가 그입니다. 프린스턴대학의 경제학 교수였구요. Machlup는 아주 독특한 경제학자입니다. 샘플링 바이어스일 수도 있는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식인들이 많기도 하고 독특하다, 창의적이다, 또는 자유주의적이다는 느낌을 주죠. 멩거와 같은 한계효용론자 출신이 있구요. 또 Hayek으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경제학파는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영미의 자유주의 경제학자와는 학풍이 다른 면이 있습니다. 제도와 같은 정성적인 측면, 인간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에 천착한다고 볼 수 있죠. 철학의 비트겐슈타인, 수학의 괴델은 독특한 사고방식을 통해 breakthrough를 이룩한 대단한 천재들이었구요. 미술의 클림트나 에곤 쉴레도 독특한 화풍을 개척했죠. 음악이 아니더라도 오스트리아 출신으로서 독특한 경지를 개척한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음악은 너무 잘 알려져 있구요)  Machlup도 이러한 특성들이 있어요. 그 자신도 통화경제학에 성과가 있지만, 지식이나 경제학의 방법론과 같은 정성적인 영역에도 관심을 많이 두었어요. 그리고 자유주의자였구요. Hayek을 좋아했는지, Hayek에 대한 평전을 편집하기도 했습니다 (<Essays on Hayek)). 

Machlup은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1962년에 그의 대표작인 <The Production and Distribution of Knowledge in the United States>를 내놓은 이후에 <Information through the Printed Word: the Dissemination of Scholarly, Scientific, and Intellectual Knowledge. vol 1. (Book Publishing), vol 2. (Journals), vol3. Libraries를 1978년에, 그리고 vol. 4 (Books, Journals, and Bibliographic Services)를 1980년에 출판합니다. 그리고 같은 해 1980년부터 그의 1962년 저서를 보다 풍부하게 서술하는 작업의 결과인 <Knowlege: its Creation, Distribution, and Economic Significance>을 출판하기 시작합니다.(1권. Knowlege and Knowledge Production) Machlup은 이 작업이 8권으로 발간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 78세인데 말이죠. 그는 1983년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돌아가는데, 그 전까지도 아주 건강했다고 합니다. 지적이기도 하지만, 스포츠맨이기도 했다고 하는 군요. 그가 돌아가기 전까지 나온 책이 2권. <The Branches of Learning>(1982), 3권 <The Economics of Information and Human Capital>(1984)입니다. Machlup은 3권의 출판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Machlup은 처음엔 연구개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점차 지식의 범위를 넓혀야 겠다고 판단합니다. 그는 그래서 적어도 우리의 산업분류에 잡히는 지식의 범위를 포괄합니다. 여기서 그의 의도가 경제재로서의 지식에 목적을 둠을 알 수 있죠. 과학과 기술뿐만 아니라, 미디어가 제공하는 다양한 사실들과 뉴스들 그리고 문화예술의 산물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점을 제가 높게 평가하는 바입니다. 사실, 1970년대부터는 지식담론이 풍부해지죠. "지식사회", "정보사회"같은 개념들이 확산되기 시작하죠. Bell, Toefler, Drucker 같은 사람들이 그 전도사들이죠. 그런데, 이들이 주목하는 지식이 과학기술 또는 정보나 그 통신기술에 주목하는 면이 있어요. 폭이 좁다고 할 수 있죠. 이에 반해서 Machlup은 1962년 저서에서부터 지식을 폭넓게 상정하고 있어요. 이후의 저서들은 1962년 저서의 elaboration 또는 articulation이라고 볼 수 있죠. 저는 이러한 그의 지식의 범위가 다분히 대륙유럽적인 좁히면 오스트리아적인 문화적 기반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영국, 미국이 다분히 quantity와 실용적인 데 초점을 둔다면 대륙유럽은 인문적이고 정성적인 면까지도 생각해내는 면이 있죠.

Maculup은 지식을 유형화하는데서 논의를 시작합니다. 그의 논의의 범위를 정하기 위한 것이죠. 이러한 유형화는 특히 논의의 초기 단계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유형화의 시도는 멀리 서양학문의 원조라는 Aristoteles에게서 시작하죠. Aristoteles는 <논리학>의 시작은 "정의"라고 합니다. Aristotels는 다양한 범주들(유형화라고 볼 수 있죠) (그는 10개 정도의 범주를 설정하죠. 모양, 질, 운동성 등)의 교집합으로 대상을 정의하죠(<철학이야기>(윌 듀런트) 또는 <아리스토텔레스>(루피드 우드핀 지음, 김태경 옮김, 김영사, 하룻밤의 지식여행 26). 이것은 모든 학문의 기본이 되겠죠. 이렇게 발전한 대표적인 학문이 생물학이겠죠. Machlup도 비슷하게 다양한 범주를 설정하고 지식을 유형화를 시도합니다. type(what, that, how 등), elements(being aquainted, being familar 등), degrees(remembering, recognizing 등) 같은 게 범주에 해당하죠. 이렇게 미처 범주화되지 않는 분류도 많이 제공됩니다. 1962년 작에서 다소 초보적이고 직관적인(heuristic) 분류를 시도했다면, 1980년 (제1권) 작에서는 인식론, 언어학 같은 지식에 있어 전통적으로 논의가 활발한 학문의 논의성과를 빌어오기 때문에 서술이 훨씬 더 체계화됩니다. 이러한 구분 중에 특기할 만한 것은 그가 information을 knowledge에 비해서 제한적인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information은 개별화된 지식인 반면에 지식은 일반적으로 가설, 이론 등 훨씬 폭넓은 것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이리러한 접근 방식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information society의 개념보다도 knowledge society가 보다 적절하고 특히 요즈음에 있어서 지식의 통합적 측면과 연관지어볼때는 더더욱 그게 타당합니다.

이렇게 방대하고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게 의외였어요. Machlup이란 이름을 얼핏 알고는 있었지만요. 제가 추측컨데, (1) 그가 몸담고 있었던 경제학이 그의 시대에는 지식이라는 주제에 소홀했던 탓이 있었겠고 (2) 지식사회학론자들처럼 대중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키기에는 상대적으로 그의 저작은 분류, 계량적 추정(지식산업의 비중같은)에 초점을 두고 있었고 (3) 철학이나 언어학과 같은 정치한 articulation은 이루어지지 몫하고 다분히 heuristic하게 논의를 전개하는 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론적으로는, 경제학의 경향을 바꾸지를 못했고(사실은 1980년대 후반에야 신성장이론이 등장하면서 일정하게 지식을 경제학내에 이론화하기 시작하죠) 그렇다고 철학이나 언어학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으며(반대로 이들 분야에서 채용해왔죠), 대중적으로는 대중의 상상을 자극하는 미래전망이나 시대에 대한 예리한 진단을 제시하지는 못했다고 생각이 듭니다. Machlup 본인과 총 몇 십명에 이르는 RA들의 노력에 비추어서는 상대적으로 빛을 못 보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저에게는 굉장히 고마운 성과입니다. 제 사고 스타일이랑 비슷한 면이 있는데 제가 생각해야할 상당부분을 이미 만들어줬기 때문에 저는 이에 기반해서 좀더 정치하게 이론화한다던지, 아니면 그 의미를 외현시키는 것(시대정신이나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노력을 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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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키워드로 계속 관련 저작들을 공부하고 있는데, 몇 개의 문헌을 간략하게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식론에서의 지식이론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것 같더군요. 과거에는 형식적인 내용 아닌가 싶었는데, 역시 필요없는 지식은 없다 싶습니다. 독자가 미처 받아들일 준비가 안되어 있을 뿐이죠. 얼추 훑어 보기만 했는데, <The Theory of Knowledge>(Pojman),  <The Theory of Knowledge>(Moser, Mulder, Trout), <현대지식론>(레러 지음, 한상기 옮김) 등이 그러한 교과서들입니다.

사회학적 접근으로서는 다음을 소개할 수 있겠습니다. (1) Merton이 사회학자로서 지식 특히 과학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죠. 그의 <Social Theory and Social Structure>(1968)는 고전인 듯합니다. 이 방대한 저서에서도 Sociology of Knowledge 주제와, sociology of science라는 주제하에 몇 개의 장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의식은 지식 자체에 대한 이론화라기 보다는 지식와 사회제도와의 관계같은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막스의 상부구조/하부구조와 같은 논의와 지식이 맞닿은 지점같은 곳이죠. 그리고 지식론에 있어서 과학에 좀 편중되어 있습니다. (2) Michael Polyani가 쓴 <Personal Knowledge>와 <The art of loving>입니다. 아직 책 내용은 없고 Machlup에서 인용되어 있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Polyani 가족은 지식 명문가죠. 대전환을 쓴 Karl Polyani가 형제이구. 그 아들은 노벨화학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Michael Polyani도 처음엔 화학자로 시작했다고 하는 군요.

경제학분야에서는 "지식경제학"이 한 분야라고 할 수 있을텐데, 아직은 별로 연구가 없어 보입니다. (1) <지식경제학>(도미니크 포레이 지음, 서익진 옮김)이 있구요. 지식의 범위가 제한적이긴 합니다만, 참고할만합니다. 저는 Machlup이 여기서 인용이 되어서 구하게 되었습니다. 경제학에서는 "지식경제학"보다는 그래도 "서비스경제학"이 좀더 많이 활용되는 주제어입니다. (2) 계량서지학적 접근은 경제학자들이 많이 시도했는데(양이 되어야 경제학이 다룰 수 있으니까요), <계량서지학과 인용분석: SCI에서 사이버매트릭스까지>가 잘 정리한 책인듯합니다.

통합적 지식과 관련해서 다음의 책들을 추천할만합니다. (1) 김영식의 <인문학과 과학>은 서양의 학문의 계통과 더불어 동양의 학문의 계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서의 제목이 시사하듯이, 김영식은 통합적 지식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죠. 김영식 역시 한국은 통합적 지식이라는 게 서구보다도 훨씬 빈약하다고 짚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통지식의 기반은 풍부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이미 소개한 Machlup의 저서 1권 그리고 집중적으로는 2권의 Branches of Learning이 아주 상세하게 학문체계의 발전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김영식은 Machlup을 인용하고 잇지는 않은데, 어쩌면 더 풍부하게 인용할 거리가 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를 들면 Machlup은 일본의 science에 해당하는 科學(ka gaku)의 개념도 간략하게 짚습니다. 학문체계의 발전에 대해서는 유럽의 지성인답게 엄청나게 박식하게 서술하고 있구요. (3) Snow의 <The Two Cultures>는 스노우의 강연록인데, 강연내용은 그렇게 길지 않더군요. 서두에 Collini가 그 배경을 서술한 대목이 볼만합니다. 원래 과학자 출신이었던 Snow가 나중엔 소설로 성공을 했는데, 그의 작품을 문학성 떨어지는 기계주의적 소설이라고 신란하게 비판한 Leavis라는 평론가가 있습니다. Snow는 Leavis가 대표하는 인문주의자들이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neo-luddite라고 비판하는 것이에요. Snow의 통합은 과학의 입장에서 지식의 통합적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지요. 정도는 좀 다르지만 Wilson의 Consillience랑 비슷한 면이 있죠. (4) 한중일 심지어는 베트남도 science를 과학으로 번역해서 씁니다. 저도 왜 科學이라는 단어를 생뚱맞게 썼는지 과연 언제부터 그랫는지 궁금했습니다. 한국과학사를 연구한 박성래 교수의 글을 인터넷에서 찾았습니다.  http://www.kaeri.re.kr/~wonwoo/w02_5/eyagi.htm  박성래교수는 일본에서 분과학문의 개념으로 과학을 쓰게 되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한자권 국가들에게 퍼져나가구요. 저는 썩 좋은 번역은 아니었다고 생각이 듭니다. science는 그 라틴어의 어원인 scientia 자체가 지식을 의미한데 반해, 과학은 분과학문을 지칭하는 형식적인 개념이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점에서 과학 대신에 그냥 학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은 어떨까 싶어요. wissenschaft랑 비슷한 것이죠. 자연과학도 자연학일 수 있구요. 공학은 바꿀 필요가 없죠. 사회과학을 사회학이라고 하되, sociology랑 이중적인 의미를 갖도록 하면 어떨지. 사회과학의 원조는 경제학이 아니라 사회학이 맞을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