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가정교육 또는 교육은 풍요와 결핍의 균형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2014.1.5)
12명의 아이들을 단순히 낳아서 생명을 유지시키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은데, 적절한 가정교육의 모범을 제시하는 군요. 대단합니다.
아래 가정이 행한 바를 고스란히 다른 가정이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만 그 핵심적인 원칙을 공유하면 된다고 생각되요. 그 원칙은 좋은 가정 교육, 또는 일반적으로 좋은 교육은 '풍요와 결핍의 균형'이라고 생각되요.
부모 입장에서 그리고 자연상태의 인간의 위치를 생각해보면 아이에게 교육이 '다다익선'이라는 거의 본능적인 충동이 있죠. 여건만 되면 다 해주고 싶은 것이죠. 하지만, 이게 아이가 처한 환경이 대단히 결핍하다면(사실 인류의 대부분의 시간으 이런 궁핍이 주어진 조건이었죠), 부모가 '다다익선'의 베품을 하는 게 맞죠. 자연계의 생물들을 보면 육아단계에서 보여주는 어미들의 헌신이라는 것은 엄청나쟎아요.
그런데 인간이 일정한 생존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최근에 있어서는(이것도 요즘에야 그렇죠. 20세기 시작 무렵만 해도, 선진국, 후진국을 막론하고 유아 사망은 뉴스가 아니었어요. 그냥 신의 뜻이었죠), 오히려 '풍요'가 상당히 대중화되죠. 옛날에 소수 귀족들만 누리던 호사를 지금은 상당한 다수의 대중이 누리고 있죠. 보육도 마찬가지죠. 지금처럼 대중이 아이에 많은 관심을 두었던 시대는 없죠.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서는 '풍요'가 오히려 아이의 성장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는 거에요. 생물학적으로도 상당한 궁핍을 뚫고 살아가도록 진화된 인간에게 있어서 그런 생존력을 떨어뜨리게 되는 거에요. 예컨대, 요즘은 16세 이상의 고등학생을 어리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사회가 아이들에게 성인이 될 기회를 박탈한다고도 할 수 있거든요. 한국도 한 세대 전만 해도 고등학생 나이되면 싱싱한 노동력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겼거든요.
아래 12명 자녀를 둔 부모의 좋은 점은 결코 궁핍한 집은 아닌데도 의도적으로 궁핍조건을 만들어내고 아이들이 이 조건에서 생존하는 survival mind를 갖게 한다는 거에요. 궁핍은 꼭 물자의 부족 정도가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주어진 제한 조건(constraint)로 넓게 해석해도 됩니다. constraint가 없는 게 좋은 게 아니고 적절하게 훈련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훌륭하죠. 아래 대목에서 부모가 훌륭한 사회생활 예비 훈육관으로서의 위치를 견지하는 게 드러나요. 학교의 교사가 알기 쉽게 가르치지 않는 경우 그 교사를 탓하지 말고, 스스로 이해하는 바를 터득해야 한다는 거에요. 어차피 세상 살아가다 보면 다소 능력이 떨어지고 자기랑 맞지 않는 boss들을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죠.
If children would come home and say that a teacher hated them or was not fair, our response was that you need to find a way to get along. You need find a way to learn the material because in real life, you may have a boss that does not like you.
저는 한국의 부모들이 보육비, 교육비가 많이 든다고 불평하는 것에 대해 일견 타당성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의 부모들이 과잉 풍요를 제공한다고 여겨요. 우선 수입이 괜챦으면 그렇게 풍요를 제공하고 싶은 본능이 있죠. 하지만 정말 어려운 것은, 그래서 훌륭한 것은, 결핍을 또는 constraint를 만들어서 훈련시키는 것이에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어차피 무수한 결핍 내지는 constraint을 감수하고 돌파해야 하거든요. 이런 멘탈이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생기지 않아요. 유년 시절에 적절히 경험할 수만 있다면 정말 소중한 체험이 되는 것이죠.
부자가 3대를 넘기기 어렵다는 통설이 있죠. 서양에도 비슷한 통념이 있어요. 다행스러운 것이죠. 한번 부자가 영원하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재미없는 단조로운 세상이겠죠. 부를 대를 잇기 어려운 것은 부라는 게 대단히 신기루같은 것이라서 그래요. 부를 유지할 수 있는 판단력과 태도가 결여되면 엄청난 재산도 하루 아침에 날리게 되죠. 그리고 그런 판단력/태도의 결여가 역설적으로 '풍요'로는 조건에 기인하는 것이죠. 풍요로우면 인간의 멘탈이 예리하게 단련되기가 아무래도 어렵거든요. 그래서 역전이 가능한 것이죠.
그럼 아예 가난하면 좋은가? 가난하면 '불굴의 의지'가 몸에 베는가? 그것도 아니죠. 아주 일부에게는 그런 식으로 가난이 발판이 되겠지만, 다수에게는 아예 무기력하게 체념하게 되는 멘탈이 자리하게 되죠. 적절한 풍요가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안정감과 자신감, 그리고 '좋은 삶에 대한 경험과 기억'이라는 게 있어야 사람은 역시 '도달가능한, 현실적인' 목표를 상정할 수 있게 되죠.
풍요만 있는 경우와 결핍만 있는 경우 선택을 하라면 그래도 전자죠. 결핍되어 있는 경우는 '풍요'를 simulation하는 게 어렵거든요. 반면에 풍요롭다면 그래도 부모가 스스로 절제하면 결핍을 simulation해낼 수 있구요.
그렇다면 결핍한 쪽은 영원히 결핍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개별 가정에만 맡겨두면 그럴 가능성이 크죠. 언젠가는 벗어나더라도 그 언젠가가 100년-200년 이후라면 그것은 의미가 없죠. 결핍된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죄로 결핍이 거의 필연적이라면 너무 불공평하죠. 완전히는 어렵겠지만 너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커나가게 한다는 것은 가혹하죠. 그리고 사회의 유동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사회에도 좋지 않구요. 많은 다수가 discouraged 상태에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인적자원의 낭비죠. 그래서 사회적 개입이 제도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부모세대의 빈곤이 자식세대로 너무 일방적으로 이어지진 않게 개입이 필요한 것이죠. 그래서 최근에 북구 유럽 국가는 아예 육아단계에서 결핍된 가정의 부정적인 효과를 가급적 최소화하기 위해 보육을 사회화하는 것이죠. 보육뿐만 아니라 아이가 20세 정도까지 성장해가는 동안 단계별로 '결핍의 대물림'의 부정적 효과를 견제해낼 수 있는 적절한 개입이 필요하구요. 그리고 일정 정도 그렇게 하고 있죠. 보편 의무 교육은 그런 좋은 예겠죠. 다만 그것만으로는 이제는 부족하다고 여겨지고 있어서 더 많은 사회적 기제가 요구됩니다.
http://qz.com/165716/how-i-made-sure-all-12-of-my-kids-could-pay-for-college-themselves/
STURDY DOZ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