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 연구의 성과가 생각보다 깊네요
(2010.7.12)
흥미로운 책들을 뜻밖에 많이 입수한 덕택에 이번 주말까지 일주일 넘게 책읽은 재미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크게는 두 갈래의 독서였습니다. 하나는 조선의 유학을 중심으로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식을 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보려는 것입니다. 두 갈래 모두 의도했던 독서는 아니었고 그야말로 제 관심사와 맞닿는 좋은 책들을 접하게 되어서 가능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읽고 싶은데, 해야할 일도 있고 하니까 이쯤에서 일단 멈춰야 하는 아쉬움이 큽니다.
조선의 유학, 한국의 철학, 그리고 동양의 철학에 대한 연구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깊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여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글쓰기가 이루어져서 초보독자로서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흥미를 가지고 집중하게 되네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선유학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를 넓히는데 크게 도움을 얻었던 책들이 한형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의 책들입니다. <왜 조선유학인가>(2008, 문학동네), <조선유학의 거장들>(2008, 문학동네). 앞의 책은 다 읽었고, 두번째는 시간관계상 주제가 저의 궁금사항에 닿아 있는 부분들 위주로 읽었습니다. 이 두 책을 워낙 재밌게 봐서 같은 저자의 <왜 동양철학인가>(2000, 문학동네)도 사서 맨 앞의 불교에 대한 장을 봤습니다. 덕택에 관심사가 동양철학에까지 넓혀지게 되네요.
한형조는 현대의 언어로 조선의 유학 그리고 동양철학을 '해석'하겠다고 하는 군요.(<왜 동양철학인가>의 머릿말). 이러한 저자의 시도가 저자의 책들에 집중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저자가 말하는 현대의 언어라 함은 전의 문구가 신비화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이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고전이 그 당대의 사회적 상황에 맞춰서 해석되어져야 하고, 다시 오늘날에 어떤 의미를 던져주는 것인지를 밝혀야 합니다. 몇 개의 구절을 해석하기 위해서 이런 방대한 작업을 거쳐야 하는 군요. 그리고 아마도 일정 정도는 저자의 상상력이 필요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상상력이 탁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저자는 젊은 시절에 문학과 동양철학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합니다. 문학이란 단어에서 탁하고 무릎을 치게 됩니다. 저자의 글들이 개별 문구에서나 또는 글의 구성에 있어서나 문학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 점도 저자의 글들이 잘 읽혀지게 하는 한 미덕입니다.
저자의 글들이 워낙 매력적이고 머리를 시원하게 하는 깨달음을 얻게 해서 밑줄을 긋건 포스트잇을 붙이건 거의 모든 면에 읽엇던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래도 사장하고 몇 개의 요지를 정리해야만 이 글이 컨텐츠로서 기여하는 것이겠죠.
(1) 조선의 유학은 엄청나게 풍부하다는 것입니다. 먼저 조선의 유학이 많이 기대고 있는 주자학 자체가 그렇습니다. 최근 읽은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을 읽으면서 조선의 유학의 풍부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개략적으로 읽어간 바람에 이해의 구체성이 낮았는데, 한형조의 책들을 읽으면서 조선의 유학이 좀 더 구체적으로 와닿습니다.
게다가 주자학 자체에 대한 저의 인식도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주자학에 대한 이미지(인식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얇죠)가 일련의 반주자학 또는 근대화프로그램에 의해 형성되었던 것이더군요. 일제시대,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의 사색당쟁을 비판하면서 조선의 패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끌었는데, 이에 대항해서 1930년대 국학자들(정인보, 안재홍 등)이 실학을 그 반대근거로 내세우면서 실학을 반주자학으로 위치지웠군요. 이것은 '실학'이라 불리는 조선 후기의 유학을 연구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지만, 의도와는 달리 결과적으로 일제의 근대화프로그램을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근대화프로그램하에서는 그것에 방훼되는 또는 적으로 설정된 것들에 대해 교조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죠. 주자학이 그 좋은 공격 타겟이었다는 거에요. 이것은 군부독재가 추진해온 근대화프로그램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실학은 계속 부각되고 주자학은 공격받았죠. (<왜 조선유학> 제4장. 동양철학은 왜 이리 어려운가?) 그러나 실학을 연구하면 할수록 실학과 주자학의 차별성은 약화되는 거에요. 실학의 거두로 일컬어 가장 많이 연구되었던 정약용 마저도 주자학자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해진다는 것입니다.(같은 책, 제3장 21세기, 실학 너머의 유교 이야기를) 명백하게 주자학자로 볼 수 없는 '실학자'는 기철학의 최한기 한 명 뿐이라고 하네요. 이렇게 연구가 깊어지면서 우리가 실학으로 주자학과 차별화시켰던 것이 그다지 명료해지지 않으면서 주자학 자체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하려는 노력들이 행해진 거죠. 즉 우리에게 실학이라고 일컬어졌던 조선의 학문사조가 사실은 주자학의 토대위에서 그리고 그 범위 안에 있었다는 것이고, 이 점은 주자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보다 풍부해져야 한다는 것이겠죠.
주자학의 풍부함은 주자학이 도교나 불교에 많이 의존하고 있으며 또한 기독교 마저도 주자학과는 상당히 유사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자학이 도교와 불교에 의존하는 점이 많다는 것은 교과서에서 배우기는 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죠. 이것이 갖는 의미는 주자학은 '깨달음의 학문'이라는 것이죠. 우리의 유학에 대한 이미지는 엄한 선생님이 엄격한 훈육을 하는 것인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이(理)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고유한 성(性)을 일깨워야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주자학을 성리학이라고도 하는 거죠. 이런 깨달음은 다분히 주자학 역시 반성적인 학문이면서 또한 신학적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에요.(같은 책, 6장 주자 신학 논고 시론) 중국에 대한 경험이 많았던 마테오 리치나 롱고바르디 같은 서양의 가톨릭 신학자들은 주자학을 무신론으로 이해한 데 반해, 정작 라이프니찌는 선교사들로부터 전해들은 얘기만으로도 주자학은 신학이다라고 봤다는 거에요.(같은 곳) 다만 라이프니찌는 내세관과 예정설이 없기 때문에 주자학은 아직은 수준이 낮은 신학이라고 했다는 거죠.(라이프니찌는 주역에 대한 얘기를 듣고 감동했고 이게 본인의 2진수 이론과 맞다고 했답니다)
실학을 포함한 조선의 유학은 (실학 자체가 도교와 불교에 대해 주자학이나 성리학을 차별화시킨 개념이죠) 리, 성과 기, 심 등에 대해 비록 형이상학적 논의이기는 하지만 정말로 많은 고민을 했고 그 고민의 목적은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잘 어울려 살아가는 도덕적 사회를 만들까 하는 것이었죠. 그 결과로 사단칠정론(이황은 주리론, 이이는 주기론적 이기일원론이라고 합니다.), 인물성동이론(사물과 인간이 같은 성을 부여받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논쟁 - <거장들> 4장. 인물성동이론의 논점과 해법) 같은 논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던 거죠. 후자만도 얼핏 보면 형이상학적이간 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인간과 자연을 구분해서 볼 것인지 아닌지, 더 깊어지면 인간 내에서도 차별화시켜서 볼 지 말지에 대한 중요한 태도의 차이를 낳습니다. 인간과 자연을 차별화했던 것아 근대화의 과정이기도 했지만, 이제는 생태환경주의 입장에서 그것을 비판하고 있죠. 또한 인간을 차별적으로 보게 되면, 법치와 같은 것을 강조하게 되고 그렇지 않은 경우 덕치를 강조하게 되죠. 이처럼 얼핏 형이상학적인 듯한 논쟁이지만, 중요한 현실에서의 함의를 갖게 되고, 이러한 논쟁은 언어는 달랐지만 서구에서도 전개되었던 것이죠. 조선의 유학은 지나쳤다 싶을 정도로 이러한 논의를 발전시켰고 그 결과 심성론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남긴 것이죠.
(2) 조선 유학이 박제화된 훈고학이 아니라 실존적 현대인들에게도 여전히 부딪치는 고민과 선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한형조가 재밌는 도식을 소개합니다.(<왜 조선유학>-9장 조선유학의 지형도) 다음 그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유형화하면, 현대인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택할 수 있거나 또는 몇 개의 유형에 겹쳐서 자신을 위치지울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언어는 오래되었지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물질의 관계는 지금 역시 보편적인 문제이며 이에 대한 관점에 따라 사람들을 분류할 수 있는 것이겠죠.
유학에 대한 서구의 관심 역시 역사적인 것만은 아닙니다(유명한 중국과학기술사학자인 조지프 니덤은 그의 대표작인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퇴계의 성학십도를 번역했네요-(<거장들>-제2장 퇴계의 성학십도)
. 2003년 하버드에서 다산학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는데(다산학회를 미국에서 개최한 것이죠), Michael Kalton교수는 한국유학의 권위자로고 합니다.(U. Washington Tacoma 교수)(http://www.tacoma.washington.edu/terrain/archive/march2007/GreatMinds.html). 그는 주자학이 신의 주재 없이도 이와 성으로 우주와 인간이 자기조직적 방식으로 생태계적 시스템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존중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자학에서 탈근대의 정신을 찾는다고. (학회에서 Kalton은 정약용이 오히려 상재라는 서국의 인격신과 유사한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이러한 자기조직성의 정신에 비추어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고 하고, 한형조는 주자학 자체가 신학의 측면이 있다고 커멘트했다고 합니다.)(<왜 조선유학>-2장 하버드 다산학 국제학술회의) 이처럼 주자학 그리고 성리학은 이처럼 탈근대시대에 오히려 주목받고 있는 사상이 된 것이죠. 한형조는 서구의 철학자들이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연구성과를 축적해서 동양철학이 오히려 서구에 밀린다고 합니다.(<왜 동양철학-"동양철학에싀 접근")
(3) 우리는 우리의 생각보다도 인문적입니다. 얼마전에 안철수연구소의 설립자이자 지금 KAIST교수로 있는 안철수가 무릅팍도사라는 토크쇼에 출현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면서 격찬을 했습니다. 안철수가 그러한 감동을 주었던 것은 돈버는 재주를 말한 것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얘기했기 때문이겠죠. 한형조가 <거장들>의 2장 퇴계의 성학십도, 주자학의 설계도에서도 안철수를 인용하고 있습니다. 안철수가 자서전 <CEO 안철수 ,영혼이 있는 승부>(2001, 김영사)에서 정신적인 성취감을 가진 사람을 선호한다. 그래야 물질적인 성취감도 따라온다라는 요지의 견해를 밝힙니다. 그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여기서의 안철수는 현인의 느낌을 주고도 남죠. 이러한 사람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은 인문적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외국도 한국도 인문학이 붐인 듯합니다. 클레멘트코스는 재소자나 홈리스들에게 정작 '실용적'인 교육이 철학 등 인문학교육이었음을 보여주죠. 스티브 잡스는 '인문학과 기술의 만남'을 모토로 내걸고 있죠. 근대화프로그램이 강력했던 한국에서는 그만큼 인문학에 대한 수요가 많습니다. 서구의 기술을 모방해서 성과를 거두었던 CEO들도 이제 창의적인 문턱에 들어서면서는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강한 듯합니다. 특히 오래동안 벽안시되었던 한국의 인문학적 전통 나아가 동양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다고 합니다. 한형조도 <동양철학인가>-"동양철학에의 접근에서 이를 언급합니다. 팬택은 CEO가 해외교류를 많이 하다보니까 한국에 대해 이해가 부족함을 느껴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매년 몇 억 원 정도를 후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서구의 경영이론 대신에 유교적 리더쉽도 대두하고 있다고 합니다. (<조선유학인가>-3장 21세기 실학너머의 이야기를)
서구나 한국이나 이미 기술이라는 것이 흔한 지식이 되어버린 듯합니다. 그리고 이제 기술을 받아서 쓰는 사람들 즉 타자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때는 기술은 공급만 해주면 존중을 받았지만 이제 그렇지 않은 거죠. 타자에 대한 연구인 구조주의 또는 탈구조주의가 대두한 것은 자연스럽다고 여겨집니다. 주체를 강조했던 근대화와 그 동력인 기술이 실패하고 있으니까요. 인문학도 다양하겠지만(그리고 한때 동양이나 서양이나 굉장히 교조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이러한 탈근대에서의 인문학은 이제는 인간에게 새로운 '중도'로 다가오는 듯합니다.
한때 지나치게 인문학적이었고 그래서 근대화에 적절한 대응을 못해서 이루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던 한국이지만, 이제는 뒤늦게 그게 자산이 되는 듯합니다. 엄청난 단절을 시도했지만, 한국에는 '보이지 않는 유교'의 저력은 한류를 대표하는 전통드라마(대장금 같은)에서 여전히 입증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은 여전히 도포입은 실천적 유학자들이 있는 나라이죠.(일본, 중국도 이러한 실천가들은 없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이 근대화에 성공함으로써 과거 지나치게 스스로 핍박했던 것에서 벗어나 소중한 것은 챙기게 될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조선유학인가>-3장 21세기 실학)) 그리고 불교-유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사상은 그야말로 처음부터 타자에 대한 철학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는 것을 최고의 목적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애초부터 타자지향적인 한국의 철학과 서양에서 최근 몇십년간 부각한 포스트모더니즘은 참 비슷한 면이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인문학이 자칫 빠지기 쉬운 교조성이나 공리공담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효조는 이러한 점을 비판하고 조선의 유학이 이러한 측면에 빠졌슴을 비판합니다. 그는 그래서 제도와 직업 등 사회기능을 강조한 법가철학에도 관심이 간다고 합니다.(<왜 조선유학>-1장 조선은 왜 망했는가; <왜 동양철학>-책머리) 하지만 저는 조선의 멸망을 유학으로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현재의 한국의 발전의 동력을 굳이 법가에서 찾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해법은 세계화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철학이던 고립되면 교조화된다고 봅니다. 고립되었고 또한 생산력의 증진 또한 제한된 조선이라는 사회의 지배철학이 교조화되는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훨씬 더 확률이 높다고 생각합니다(고립된 문명은 변화가 없거든요). 제한된 파이를 놓고 나름대로 평화롭게 분배하는데 머리를 짜낼 수밖에 없쟎아요. 이미 세계 속에서 경쟁하는 한국에서는 이미 어떤 사조도 지배적일 수 없습니다. 유학의 중요성이 재부각된다고 해서 한국이 유교사회로 돌아갈 수는 없거든요. 근대화로 인해 지나치게 억압받았던 우리전통속에서의 인문학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중도를 꾀할 뿐인 것이죠. 하물며 유학이 이제는 그 세계적인 성격에 주목할 수 있는 탈근대사회이구요.
--------------------------------------
요 책들 보기 전에 두어 권의 책을 살짝 접했습니다. 그리고 이왕에 책 몇 권을 보다보니까 관심이 더 늘어갑니다. 논어/맹자 주석서도 또 챙기게 되구요. 제가 맹자는 좀 원리주의적인 느낌이 들어서 꺼려졌는데요, 사단칠정은 맹자 책에서 시작하는 점에서 역시 중요한 사람이구나 싶습니다. 그러면서 관심이 동양철학 전체에도 확장됩니다. 그리고 철학자들에 대한 보다 실존적인 텍스트들도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자료와 해설-한국의 철학사상>외에도 통사적인 접근을 한 책도 발견했습니다. 이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한국철학사연구회, <한국철학사상사>(2003), 심산
- 이용주, <동아시아 근대사상론> (2009), 이학사
- 신동준, <공자론>, <맹자론> (2006), 인간사랑
- 김용옥, <금강경강해> (1999), 통나무
- 박석무, <다산 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2003), 한길사
- 박종채, <나의 아버지 박지원> (2005), 박희병 옮김, 돌배게
- 한영우 외 (한림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다시, 실학이란 무엇인가> (2007), 푸른역사
- 백민정, <정약용의 철학> (2007)
제가 본 것 중에서 한영우 외 책에서 머릿말과 처음 장 "실학연구의 어제와 오늘"이 우리가 실학에 대해서 오해하게 되었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해줘서 초보자에게 좋은 듯합니다. 이 책의 나머지 부분과 백민정의 책은 전문성이 높아서 차후에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저도 아주 일부만 봤습니다.
이상의 내용이 너무 길어져서 주말까지 봤던 다른 갈래의 주제의식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지식"의 측면에서 읽었던 내용은 다음 공간을 써서 정리해야겠네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