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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연구가=secretary=facilitator

데시카 2010. 7. 1. 13:32
(2010.7.1)

정책연구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학습이라는 것이 없어서, 각자 알아서 체득하게 되는데, 연구하고 발표할때마다 고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논문은 쉽습니다. 기존연구소개하고, 자기연구의 가설 소개하고, 그리고 가설을 입증하는 컨텐츠를 발표하면 됩니다. 가설도 반드시 자기가 만들 필요 없습니다. 학계에서 떠도는 가설을 자기가 특정부문에 적용해보면 됩니다. 또한 가설은 사실에 대한 진단에 대한 것이 많아서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정책연구에서는 가설이 일반논문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정책가설이라고 부릅니다. 정책가설은 진단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을 하기 위해서는 ~를 해야 한다"는 형식입니다. 즉 what을 정의해주고 이것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행동(action, 또는 how to do)을 해야하는지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고서에서는 이 주장을 컨텐츠로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책연구의 가설은 '세상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자연히 정책가설은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한 컨텐츠의 부담이 훨씬 많은 것이지요. 논문이 추상이라면 정책연구는 구체입니다. 역시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이 필요한 것이지요.
 
정책연구를 요즈음은 각 분야학문에서 전공자들(박사들이 대부분)이 하니까, 전공(discipline)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많죠. 그런데, 사실 학교의 전공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죠. 일반적인 논문을 쓰는 것을 가르치는 것 이상일 수 없죠.
 
그렇다면, 정책연구 또는 정책연구자의 모델은 어디서 올까요? 이 모델을 secretary나 facilitator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facilitator도 사실상 secretary인데, 서양에서도 secretary가 지원업무라는 수동적 업무를 맡는다는 인상이 강해졌나봐요. 그래서 요즈음은 facilitator란 단어가 쓰이는 것 같습니다. facilitator는 단어 자체가 능동적인 느낌을 주니까요. 
 
원래 회의를 통한 의사결정을 중요시하는 조직에서는 그 회의의 의제를 정하고 회의후에 쟁점들을 다시 정리해서, 그 회의에서 합의할 수 있는 것과 합의가 되지 않아서 여전히 쟁점사항으로 남는 것들을 교통정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secretary입니다. 저는 학교다닐때는 왜 공산당에서는 서기장이 제일 중요한 자리인지, 왜 UN의 사무총장을 secretary-general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안되었어요. secretary에 대한 이미지가 업무지원이어서 그렇겠죠. 우리가 secretary=서기로 부르기도 하는데, 서기에 대한 이미지도 크게 안다르죠. 서기에 대한 이미지는 국회나 법정의 속기사 같은 것이죠. 우리가 회의록 작성을 하는 것을 위촉연구원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secretary=서기=지원업무라고 여기는 관념의 연장선상에 있죠.
 
그런데, 정말로 이 서기가 하는 일이 엄청나게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미 권력을 내재하는 것이라는 거에요. 회의에 앞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의제를 정하는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의제화되는 순간 이미 80-90%는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지구의 기후문제를 예를 들면, 이게 리오에서 의제화가 시작되니가, 교토, 코펜하겐 이렇게 이어지는 거에요. 의제의 힘은 막강해서 공식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면 어떻게든 substance를 안만들 수가 없어요.
 
의제하에 논의를 한 뒤에 과연 무엇이 쟁점이었는지를 정리하는 것도 엄청난 능력이기도 하고 권력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회의를 하면 잡다한 주장들을 하죠. 요러한 주장들을 포괄하는 프레임(위계구조)를 설정해야죠. 그리고 크게 몇가지의 위계가 높은 테마를 설정해주고 다시 작은 테마들을 밑에 배치하겠죠. 위계화구조에서 빠져나가는 테마들도 있죠. 이것은 기타가 되겠죠. 벌써 자기의 주장이 큰 테마에 속할지, 작은 테마에 속할지, 기타에 속할지에 따라서 그 영향력이 판별되는 거죠. 자기의 주장이 기타에 있다면 주장을 배제한 것은 아니니까 뭐라고 따지기는 어렵죠. 그러나, 이미 자기의 주장은 한참 밀려버린 거죠. secretary가 이렇게 구조화시키는 권한에 기반해서 이미 의제들의 priority setting을 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아무리 주장들을 개방한다 할지언정 주최측 구체적으로는 secretary의 의도가 70-80% 관철되는 거에요. 참여자들은 secretary처럼 고민도 약하고 준비도 안되어있으니까, 그냥 따라가게 되죠.
 
이처럼 secretary나 facilitator의 역할이 정책연구가랑 같다는 것이 얼추 이해가 안될텐데, 이렇게 생각해보면 됩니다. 정책연구는 기존문헌들을 review해야죠. 이것은 적어도 문헌상에 포착된 debates들을 '듣는다'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인터뷰를 한다던지, 토론을 한다던지, 설문조사하는 것은 문헌상에서는 드러나지 못한 debate를 역시 '듣는' 거에요. 문헌상의 '청취'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덜 들죠. 그래서 가급적 넓게 해두는 것이 좋죠. 관련된 주제에 연관되어서 문헌상에 드러난 debates를 다 포착해두는 거죠. 이제 문헌상에 드러나지 않는 '잠재적 debates'는 비용이 많이 듭니다. 문헌은 어느정도 한정적이지만, 그 '잠재적'이라는 것은 한도가 없거든요. 그래서 그 범위를 잘 한정해야 하고, 그 방법을 잘 설정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의 인터뷰, 토론, 설문조사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을 잘 선정하는 것, 그것이 연구전략입니다.
 
이처럼 정책연구는 그 맥락이 항상 debate여야 합니다. 문헌을 들여다봐도, secretary입장에서 과연 그 쟁점이 무엇인지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합니다. 회의에서 회의록을 작성할 때 시간 순으로 작성하는 것은 녹취일 뿐이라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산만한 대화들에서 '쟁점'을 뽑아내는 것은 secretary의 창의적 노동입니다. 이렇게 기존의 debate들에서 현재와 맞닿아 있는 쟁점을 뽑아낸 뒤, 다시 사람들의 debate를 적절하게 조직해내는 것입니다. 새로운 쟁점이 등장할 수도 있고, 기존의 쟁점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여전히 같다거나 달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debate를 조직하는 것 역시 굉장히 창의적인 것이죠. 이미 새로운 debate를 조직하는 것 자체가 secretary가 갖는 명시적/암묵적 의도(이게 정책가설인 것이죠)를 관철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정책연구를 secretary가 debate를 조직한 뒤 작성한 회의록(녹취록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면 좀더 정책연구를 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서양에서는 이런 회의의 전통이 오래되어서 secretary등이 이러한 일을 굉장히 잘 합니다. 그리고 많은 정책연구보고서가 사실은 토론의 결과물입니다. OECD의 전문가 회의에 참석하면 이틀 정도 회의하면, 놀랍게도 secretary들이 회의만 한 결과를 가지고도 근사한 contents를 산출합니다. 회의 끝날때는 논의했던 결과를 요약해서 제시하면서 회의참가자들의 추인을 받습니다. 그러면 이게 보고서가 되는 것이죠. 이렇게 일들을 잘하는 것은 secretary들이 회의를 하기전에 secretary들은 전문가와의 사전접촉을 통해서 기본적인 쟁점개요(가설같은 것이죠)를 파악해두고, 이 가설과 관련된 사람들로 회의를 조직하는 것이죠. 그리고 회의는 기존쟁점을 확인해주거나 아니면 새로운 쟁점을 산출해주는 역할을 하는 거죠.
 
한국에서는 그러한 secretary들을 보기가 쉽지 않아요. 우선 수평적인 회의라는게 별로 없구요. 그리고 회의 그 자체가 컨텐츠라는 생각을 가지지를 않죠. brainstorm으로서의 회의가 아니라, 업무지시를 하는 자리가 회의라는 인식이 강하죠. 설령 회의가 수평적이 될지언정, 이 회의를 잘 조직하고 정리할 수 있는 secretary의 역량를 갖춘 사람들이 드물어요. 대게 회의록이 녹취록이 되어버리죠.
 
학교 다니면서도 debate라는 것을 경험을 못하죠. 회의내용를 구조화해서 기록한다는 인식도 별로 없구요. 이런 게 대학시절에도 유지되죠. 책이나 논문 읽고 평면적인 review는 하죠. 그런데 이것 역시 녹취록에 가까와요. 자기 관점에서 기존의 논문이나 책을 정리하지를 못하고 그냥 책이나 논문의 순서를 따라가면서 요약해주는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한국의 대학원의 석사가 논문을 review하는 숙제를 했는데, 교수가 "너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라"라는 주문을 하는데, 이게 어떻게 하는 것인지 몰랐다는 소회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는 평을 들은 다른 숙제결과를 보고서 얼추 비슷하게 해볼려고 했다는 거에요.
 
이렇듯이 한국사람들에게 "자기 관점에서 논의를 재구성"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과업입니다. 반면 자기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많아요. 정작 그 주장의 근거와 그 주장에 상치되는 주장이나 논거와는 상호침투를 못하는 거죠. 그래서 주장만 생경하게 튀어나오고 그 주장에 반대하면 "당신이랑 나랑은 다르군요"로 귀결되는 거에요. 탁월한 저작이나 논몬을 보면, debate의 양측면을 잘 다뤄주죠. 그럼에도 다 읽고 나면 저자의 주장에 동조하게 되죠. 이게 대화의 기술인 것이죠. 자기 주장과 상대의 주장을 다 잘 버무려주는데, 결국은 자기 주장이 약간의 우위로 기억되게 하는 거죠. 90:10으로 무리하게 이기려고 할 필요 없죠. 51:49면 충분하죠. 바둑에서 아마추어는 대마를 잡아서 크게 이기고자 하지만, 프로는 1집 심지어는 반 집만 이겨도 만족하죠. 그것은 무리하게 이기려고 하다보면 허점이 드러나기 때문이죠. 상대방을 그만큼 존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이겨야 이기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요. 그래서 엄청 목소리 대시벨을 올리구요.
 
히딩트가 예전에 한국의 축구선수들에 대해 "기술은 강한데 체력이 약하다"는 역설적인 평을 빌려보면, 한국사람들에 대해 "주장은 강한데 주관(자기 관점)은 약하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A인가 ~A인가에는 굉장히 열심히 몰두하는데, A와 ~A를 모두 담아둘 수 있는 논의구조가 무엇인지 그래서 어떻게 하면 A와 ~A 또는 예상못했던 B, C 등이 어떻게 모두 하나의 debate내로 담아두게 하는 논의틀은 못 만드는 것이죠.
 
정책연구와 논문을 대비시켰지만, 논문 역시 정책연구에 다를 게 없습니다. 한국사람들에게 있어 논문은 생소한 것이었죠. 그래서 서양학문에서 이미 판이 다 짜진 것들(가설이나 방법론)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이었죠. 그러다보니까, 논문이라는 게 형식으로만 와닿는 거죠. 논문 역시 그 origin에서는 정책연구와 다를 것 없습니다. 현실의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죠. 다만 한국의 논문이라는 게 한국의 현실을 중심으로 debate를 하지 못할 뿐이죠. 그래서 서양학문의 언저리를 맴도는 것이지요. 이제 한국에서도 지식을 그러한 식으로 만들면 안됩니다. 한국이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논문에 요구되는 것도 과거와는 다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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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한 이노베이션(2009) (톰 캘리, 조너던 리크맨)(세종서적)(원제: The Art of Innovation)이 팀이 어떻게 혁신을 수행할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이 중에 브래인스톰에 대한 장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