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연구개발사업은 기업이 존경할만한 수준이 되어야 해요
[정부연구개발사업은 기업이 존경할만한 수준이 되어야 해요]
(2017.4.22 작성)
중앙일보는 '기업주도 정부연구개발사업'이라는 언어도단 기사를 계속 내나 보네요. ETRI가 또 실패사례로 등장하는데, 언어변역기술을 냈는데 기업이 안 써줬다고 하면서 기획에서부터 기업수요를 고려해야 한다고 하네요. 어이가 없죠. 기업이 그렇게 수요가 많은 기술을 왜 정부연구소가 해요. 그냥 기업이 해야죠. 그리고 기업이 원하는 것을 할 거면, 아예 정부출연금도 일절 주지 말고 그냥 '연구기업'으로 버티는 게 맞구요.
ETRI가 통번역 기술을 개발했는데 기업이 활용하지는 않고 기술은 기술로 그쳤다고 하는데, ETRI가 도대체 왜 통변역 기술을 개발했는지가 의문이죠. 통번역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상용화죠. 그리고 부가가치가 있는 것이구요. 그럼 기업이 해야죠. 그런데 통번역의 기저를 이루는 보다 보편적인 computational science는 정부연구소나 대학이 하는 게 맞구요. 이런 기반이 있고 인력이 있다면 기업은 그것을 결국 활용할 것이겠구요.
미국에서 클린턴정부시기에 computational science는 범부처 initiative 로 정했었는데 그때는 지금처럼 AI등이 부상하지는 않은 때라서 저로서는 약간 갸웃거렸어요. SW만들기 위한 기반지식을 저렇게 범부처 이니셔티브로 강조하는 게 의아했거든요. 그런데 최근의 AI와 같은 성과들이 그런 기반 지식에서 비롯해서 꽃을 피우는 것을 보고 그런 오랫동안의 투자가 괜한 게 아니었구나 하고 뒤늦게 그 선견지명과 뚝심에 감탄을 했어요.
한국은 그런 것은 안하죠. 그러다가 AI가 뜨면 AI한다고 하고, 통번역이 중요하면 그것한다고 하고, 미국의 두뇌맵(BRAIN)이 뜨면 그것 한다고 정부연구개발사업(정부출연연구소 포함)이 달려들죠. 그렇게 떴을 정도면 이미 그 기반기술은 다 자리잡고 있으니 사실 정부연구개발사업은 별로 할 게 없을 때이고 기업이 역할을 할 때이거든요. 왜 그것을 정부연구개발사업으로 해요. 기업입장에서는 차라리 외국에서 이미 기반기술을 갖고 있는 기업을 인수하거나 아니면 기술자체만 수입이 가능하면 수입해버리죠. 이미 기반기술이 존재하는데 한국에서 그것을 쫓아가겠다고 정부연구개발사업을 발동시키는 게 정말 낭비인 것이죠.
기업이 정부연구개발사업 기획에 참여해야 하는 게 아니에요. 정부가 그래도 공공재정으로 연구개발을 한다면, 기업들이 아직 상상 못하고 있거나 어떻게 해야할지 막연하거나 알더라도 개별기업이 감당하기엔 리스크가 너무 크거나 하는 기술을 연구개발해야죠. 이런 정도의 상상력과 배짱이 있어야 기업도 존경심을 갖는 정부연구개발사업이 되는 것이죠. 기업들이 정부연구개발사업 과제 목록과 초록을 보면서, '아 이런 것들에 착안해야하는 가보다' 할 정도의 정부연구개발사업의 수준이 높아야 하는 거에요. 정부연구개발사업이 이런 정도의 선도성과 그에 따른 합당한 권위를 갖고 있지 못하면서 어떻게 기업을 끌고 가겠어요. 오히려 기업에 매달릴 수록 정부연구개발사업은 권위가 추락하고 무시나 받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