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일자리=임금노동의 절대화에서 벗어날 때에요
[이제는 일자리=임금노동의 절대화에서 벗어날 때에요]
(2018.4.7 작성)
Marx가 공산주의 사회를 정의할 때, 또는 공산주의에서는 사람들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쓴다'고 말했어요. 막스는 labor를 예찬한 적이 없죠. 왜냐면 labor는 엄연히 자본에 종속된 인간의 소외에 불과하거든요. 그래서 막스는 일한다는 것은 강제된 것이 아니라 능력이나 또는 원함에 기반해야 한다고 본 것이죠. 그리고 소비한다는 것은 '일한만큼 먹는다'와 같은 노동종속적인 개념이 아니고 그 구성원이 필요한 만큼 쓴다는 것이죠. 이게 현실적이지는 않고 그래서 막스가 공산주의가 당장 현실화될 것으로 보지도 않았고 그 경과로 사회주의(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제시했지만, Marx의 이상주의는 소외가 아닌 노동의 이미, 먹고 사는 의미에 대해 항상 염두에 둬야 해요. 그리고 막스가 원시공산주의를 모티브로 했듯이 수렵채집 사회는 그렇게 작동했으니 그게 아예 비현실적이라고도 못하는 것이죠. 예전에 MBC에서 '아마존의 눈물'에서 보여준 부족의 생활양식이 정말 그렇거든요. 능력있는 사냥꾼이 제일 많이 벌고, 배분은 대체적으로 신체 사이즈에 따라 이뤄지거든요. 사냥꾼에게 그 명예의 표상으로 약간 더 배분이 이뤄질 뿐이에요. 사냥꾼은 자기가 주로 사냥을 하기는 했지만, 그 보상이 사냥감 전체가 아니라 부족을 먹여살렸다는 명예와 자긍심이 보상이었구요.
이런 이상주의에 비춰볼 때 현실은 노동을 절대화시키면서 오히려 노동의 종속성을 심화시켰죠. 아래 필자가 타당하게 지적하듯이 그것은 오히려 자본가의 이해에 부합했던 것이구요. 아래 보면 '고용안정성'은 자본측의 이해였던 거에요. 노동자들의 근무 규율도 약하고 건강도 좋지도 않다 보니 노동자들이 정해진 시간을 지켜서 일하는 것을 자본측은 늘 바랐거든요. 근대의 작업장의 통제된 상황에 인간이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고 그렇게 작업장에 인간을 포섭해내는 게 쉽지 않아서 사회적인 이데올로기(노동신성시)가 필요했던 거에요. 그러다가 포디즘처럼 기업이 노동자의 복지를 보장하고, 노동자는 통제규율에 충성하는 교환이 이뤄지면서 기업의 일자리 자체도 신성시 된 것이죠. 기업의 일자리에 있어야 정상적인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혀지는 것이구요.
기계(자본)의 노동대체도 심해지고 저임금으로의 일자리 이동도 심해지면서, 주요 선진국들에서 '일자리'가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죠. 그리고 취업노력을 복돋우기 위해서 일자리 탐색압박을 가해서 복지를 그에 연동시켰구요. 그런데 그렇게 일자리를 강조했고 대중을 일자리로 포섭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대중의 삶은 각박해졌죠. 60년대만 해도 부부 중 한 명만이 일자리에 있었어도 삶이 윤택했는데(적어도 선진국에서), 80년대를 넘어서서는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삶은 오히려 각박해졌고 일자리를 잃을 위험은 오히려 커져갔죠. 일자리를 잃은 실업의 공포가 더욱 더 강박적으로 사람들을 일자리 강박으로 몰아갔구요.
이제 생각을 좀 바꿀 때가 되었어요. 굳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통제성이 강한 임금노동에 집착해요. 임금노동은 줄이고 오히려 그 해방된 시간에 work를 해야죠. 이제 gdp에서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는 10%도 안되요. 그리고 그나마도 이제 인공지능로봇이 다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일자리를 잃을 것을 걱정한다는데 왜 걱정해요. 그런 루틴한 임금노동이 뭐가 좋다구요. 그만큼의 임금노동을 안 하는 대신에 그렇게 인공지능이 만들어준 생산물만큼은 기본소득으로 배분하면 되는 거에요. 인공지능은 Marx의 이상을 현실화시킬 물적 조건에 근접해있거든요. 생존에 필요한 생산을 인공지능이 해주고 이게 기본소득으로 배분한다면, 인간은 '생존을 위한 마지못한 노동' 말고 자기 실현을 위한 work를 할 수 있죠. 그리고 이런 work를 해야 그 부가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구요.
그렇다고 저는 인공지능로봇과 기본소득이 제공되는 사회가 원시공동체 사회로 돌아가는 낭만적일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아요. 또는 work라는 것도 그렇게 낭만적일 것이라고 여기지도 않구요. 기본 생존을 넘어서는 생산-소비는 상징/기호에 대한 것일 텐데, 그게 없어도 되지만 관념적 동물인 인간은 그것에 집착하거든요. 부르디외가 말한 문화자본이 인간을 구별/차별하게 되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그런 상징자본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또한 자기 능력을 보여야 해요. work가 임노동은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마냥 낭만적인 것은 아닌 것이죠. gig economy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프리랜서의 삶이 미래의 work의 그림을 맛보게 해주죠. 반드시 많이 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상징자본 획득을 위해서는 그래도 꽤 일하게 되는 것이죠. 또는 성공한 entrepreneur의 삶도 미래의 work를 보여주는데, 요즘은 빌 게이츠차 워렌 버핏은 노령에도 불구하고 무지하게 열심히 살죠. 돈도 딱히 더 필요치도 않은데 Marx가 말한 '능력에 따라 일하는' 모범을 보여주듯이 일하죠. 언제부터인가 자본가의 이미지는 배불뚝이에서 날렵한 신사로 바뀐 거도 그런 일단이구요. 능력이 있어서 일하는 면도 있지만 끝없이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면도 미래의 work가 피해가지는 못할 것이구요. 임금노동에서는 많이 벗어날 수 있을지라도 '사회적으로 평가받는 노동'의 성격은 여전할 거에요.
--인용
이 글에서 ‘work’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으로는 임금을 버는 활동인 노동(labour)이 아닌 활동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을 의미한다. 노동만이 진정한 ‘일’로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스탠딩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20세기 내내 해온 일이 “일(work)의 의미를 노동(labour) 혹은 소득을 버는 활동에 국한시킨” 것이라고 한다. (정리자는 앞으로 이것을 ‘일을 노동에 종속시킨 것’ 혹은 ‘노동의 규범화’로 바꾸어 표현할 것이다.)
그는 노동이 아닌 일과 노동인 일의 차별과 그 불합리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이 지긋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6시간을 쓰면, 이는 사회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어휘에서는 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런데 만일 임금을 받고 누군가 다른 사람의 나이 지극한 친척을 돌보는 데 하루 3시간을 쓴다면 이는 일로 계산되며, 당신은 ‘취업자’로서의 어엿한 위치로 격상된다. 그리고 노동 및 사회안전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불합리하다.
스탠딩은 일의 노동에의 종속 혹은 노동의 규범화는 19세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고용안정성이라는 사회민주주의적 목표는 원래 19세기에 고용주들이 옹호했던 것이지 노동자들의 대표들이 옹호했던 것이 아니라고 한다. ‘취업 중’(in employment)이란 말도 수십 년 동안 낮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이었으며 부르주아지나 귀족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미혼 여성에게 주로 적용되는 말이었다고 한다.
출처: http://minamjah.tistory.com/226#footnote_link_226_1 [百手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