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도시와 국가의 부>(제인 제이콥스)는 명성에 비해 컨텐츠가 빈약하네요

데시카 2010. 6. 17. 12:32
(2010.6.17)
제인 제이콥스의 <도시와 국가의 부: 경제적 삶의 원칙>(한국어판, 나남출판, 영문판은 1984, Cities and the Wealth of Nations: Principles of Economic Life)가 도시, 지역이라는 주제와 관련 자주 언급되곤 해서 읽어봤는데, 처음엔 흥미롭다가 1/2정도까지 읽고서는 고개가 갸웃뚱해지다가 3/4 정도까지 읽어보고는 더 이상 집중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더 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처음에 그래도 흥미로왔던 것은 방대한 지식들이었습니다.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에 이르러 세계의 다양한 곳곳에 이르기까지 박식함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중간부터 고개가 갸우뚱해졌던 것은, 논리구조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다양한 에피소드 또는 anecdote들을 통해서 저자가 '수입대체를 하는 도시가 번성한다'는 견해를 뒷받침하고자 하는데, 수입대체의 개념도 불분명하고 그 가설의 타당성이 과연 anecdote들을 나열하면 입증이 되는 것은 아닌데 (많이 사례들을 열거한다고 입증되는 것은 아니죠), 그리고 사례들이 정말 가설을 지지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동의하기 어렵다는 거에요.
 
제인 제이콥스는 저널리스트죠. 1961년에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그린비, 원제: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으로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한번 더 기대감을 가지고 요 책을 읽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도시와 국가의 부>에서 느끼는 실망감이라는 것은 이 책이 '저널리스트적인 writing'이라는 것에 기인합니다. 저널리스트들이 A4 한두 면 정도의 글을 잘 쓰죠. 주제도 분명하고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도 좋구요. 내용도 아주 구체성이 높아서 와 닿습니다. 그런데, 어떤 저널리스트가 기사들을 쫙 모아서 책을 쓴다고 할 때 그 책은 의외로 무미건조해지거나 논리구조가 빈약해지기 쉽습니다. 이게 글의 분량에 따라서 글의 호흡이 달라지기 때문인데, 독자가 5분 정도 투자해서 읽으면 되는 글에서 얻고자 하는 것과 최소한 대여섯 시간을 투자해야 이해가 되는 책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죠. 전자는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만족한다면, 후자에서는 기승전결의 논리구조를 갖춰야 합니다. 전자는 episode나 anecdote들을 언급해주고 간단하게 시사점을 제시해주는 것이 효과적인 구조라면, 후자는 책을 관통하는 개념들이 정의되어야 하고 그리고 그 개념들간의 유기적인 연관이 이루어져야죠. 건축물같은 것이죠. 개념들이 주요한 구성요소라면, 이 요소들이 잘 엮여져서 구조물이 되는 거죠. 저널리스트들이 대게 후자에 약하죠.
 
 저널리스트적인 writing이 갖는 장점(구체성, 선명성)과 학술서가 갖는 논리구조가 모두 갖추어져 있으면 최상이죠. 또는 한편으로는 저널리스트적인 writing을 하다가, 학술적인 writing으로 변신이 가능하면 좋죠. 그런데 그런 재능이 있기란 굉장히 어렵죠. 제가 생각하기에, Keynes가 그 어려운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Marx나 레닌도 그렇구요. 주로 엄청난 사람들이 그런 재능을 가지고 있죠. Keynes의 학술서적을 보면 대단합니다. 지식의 깊이가 엄청나죠. 반면에 Keynes가 논평 형식의 글들도 썼는데 구체적이면서도 날카롭습니다. Keynes가 1차대전후 독일에 대한 과도한 배상부과에 대해 비판하면서 또다른 전쟁을 야기할 수 있다고 쓴 것이라던지, 소련을 방문하고 sustainable하지 않다고 논평한 글 등이 그 좋은 예죠. 반대로, 최근에 본 책 중에 Sexnian의 argonauts는 다소 실망스러운 경우입니다. Sexnian이 교수이기는 하지만, 저널리스트적인 경향이 강해요. 그래서 개념, 논리의 체계가 빈약해요. 사례들(타이완, 인도 등)은 훌륭하게 방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describe하는데, 정작 논리를 뒤집을만한 사례들 (예는 한국이나 일본) 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는 거에요. 개발도상국들이 diaspora의 네트워크를 잘 활용했다는 사례에서 argonauts 라는 선명한 개념을 제시하는 것은 성공했는데, 이게 어떤 조건에서는 성공할 수 있고 어떤 조건에서는 실패하는지에 대한 논증이 없는 거죠. 타이완이나 인도는 성공적이다. 요 것을 잘 참고해보라는 시사점을 줄 뿐이에요. 비록 책은 길지만, 실제 내용은 저널리스트적인 접근인 것이죠. 그리고 최근에 읽은 Daniel Bell의 The Coming of Post-industrial Society도 어느 정도는 저널리스트적인 경향이 있지만(Bell도 기자의 경험이 있죠), 그래도 개념들을 정식화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죠. 그래서 어느 정도 학술서적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죠.
 
<도시와 국가의 부>에서 수입대체를 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수입대체의 개념이 제시가 되어 있지를 않아요. 공급도시와 대비시켜서 사용하기도 하고 자급자족과 대비시키기도 하는데 이게 모호해요. 자급자족이 아닌 한 모든 도시나 지역은 공급도 하고 수입도 하죠. 이게 균형을 이루면 되는 것이죠. 물론 시간이 바뀌어서 공급할 게 없어졌다던지, 아니면 기존의 공급이 더이상 시장에서 요구되는 게 아니면 도시나 지역은 위기가 찾아오겠죠. 그런데, 제이콥스는 실패한 도시나 위기에 빠진 도시들을 열거하면서 공급도시였기 때문이다라고 사후적으로 도장을 찍는 거에요. 그리고 지금 나름 잘 나가는 도시들을 열거하면서 수입대체를 잘 한 도시다라고 보구요. 사전적으로 어떠한 도시나 지역이 향후 위기에 빠질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지를 전혀 제시하지 않는 거에요. 도쿄나 서울도 그런 좋은 예로 제시하고 있는데, 모든 도시는 적절한 공급과 수입을 하고 있는 것이죠. 도대체 어떤 면에서 도쿄나 서울이 수입대체를 잘한 도시다라고 판정할 기준은 하나도 제시를 안하고 있죠.
 
제이콥스는 공급 개념도 명확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요. 아마도 공급을 특정상품에 한정된 공급으로 보는 듯해요. 석유수출국들 같은 거죠. 보통 한국같은 동아시아의 성공을 수출지향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실패를 수입대체의 오류로 설명하죠. 세계시장에서 잘 나가야만 부가 생긴다는 것이 통상적인 시각인데, 이런 시각에 대한 아무런 논증도 없는 채, 특정 상품 일변도의 공급만 하면 실패한다는 거에요. 당연히 그렇겠죠. 세계시장이 변화하니까, 특정한 제품만 공급하면 경쟁력이 없겠죠. 그러니까 혁신을 통해서 시장에 맞추어 산업구성을 변화시켜 가는 것이죠. 노키아가 한 때는 목재회사였지만, 지금은 전자회사로 전환하는 게 그 예죠. 한때는 목재를 공급하고 지금은 휴대폰을 공급하죠. 그런 점에서 핀란드는 나라 전체가 공급국가라고 할 수 있어요. 작은 나라들은 다양한 제품군을 갖기 어렵죠. 그렇지만, 동적으로 주력제품을 변화시켜가면서 적응하는 것이죠. 제이콥스은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아요. 이렇게 보면 '공급'이 문제가 아니라, '공급의 적절한 변화가 없는 것'이 문제겠죠. 핀란드 같이 자기 생각에 안맞는다 싶은 사례는 아예 관심도 안두죠. Saxenian이랑 이런 점에서 비슷하죠. 이런 것을 heuristic이라고 하는 것이죠. 
 
제이콥스의 수입대체 개념을 따르면, 제일 이상적인 곳은 자급자족 지역이에요. 그런데, 제이콥스는 이런 지역은 발전이 없다고 하는 거에요 (10장. 왜 낙후된 도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가). 도시간에 적절한 공급-수입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거에요. 종잡을 수가 없어요.  
 
제이콥스가 국가의 부는 실체가 없고 국가의 부는 도시의 부의 총체로 보는데, 이것도 참 heuristic하긴 마찬가지죠. 먼저, 국가와 도시의 구분이 어떻게 가능한지 지역적 범위를 정의해야 하는데, 전혀 안하죠. 그냥 느낌 그대로의 도시죠. 그런데,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지역별로 지역에 맞는 다양한 특화가 이루어져서 이것이 국민경제의 측면에서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죠. 울산은 자동차 만들고, 동대문시장은 의류를 공급하죠. 그게 국민경제죠. 동대문 시장을 도시로 보면, 한 제품으로 특화 그 자체이죠. 그러나, 서울을 보면 좀 더 다양해지구요. 국가로 보면 좀 더 다양해지죠. 그러니까 범위를 정하기에 따라서 특정한 제품으로 특화되어 있는지 아닌지 판별이 달라진다는 거에요. 이것을 정의하지 않고 heuristic하게 접근하니까 읽어가면서 피곤함을 느끼게 되요. 재밌는 사례들이 많이 제시되어서 욕심은 나는데, 다 토막지식들이다 보니까, 이야기로서 매끄럽지가 않고 긴장감도 안생기죠.
 
<도시와 국가의 부>같은 책은 신문의 참신한 칼럼 읽는 정도로 보는게 실망하지 않는 길일 것 같아요. 나름대로 heuristic이 갖는 장점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제이콥스가 주장한 바들을 인용한다고 할 때는 문제가 심각해지죠. 인용할만한 substance가 너무 빈약해요. '인용'한다는 것것은 그만큼 권위가 부여되는 것이죠. 학술논문인용지수를 그래서 쓰는 것이구요. 저도 잘 안 읽고서 대충 인용한 적이 있는데, 챙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