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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 역시 남도다 3: 진도 그리고 남도 전체
데시카
2010. 8. 4. 15:58
(2010.8.4)
3. 진도, 전통문화가 여전히 대중문화인 곳
이미 반나절이 지나서야 진도로 출발했고 또 당일 서울로 돌아올 요량이었으므로, 진도의 여러곳을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꼭 진도에서 확인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현재진형형으로서의 진도의 전통예술입니다. 진도는 조그마한 섬인데도, 한국의 전통예술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남다릅니다. 윤두서의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아 화풍을 배우고, 김정희로부터도 사사한 소치 허련(남종화의 거장, 남종화는 중국에서 연유하여 문인들의 사색적인 세계를 그려낸 화풍)의 운림산방이 이곳 진도에 묵직하게 자리한 곳이죠. 또한 진도아리랑과 육자배기, 강강수월래가 여전히 현재진형형인 곳입니다. 진도의 예술적 전통은 일부 문인이나 직업적 예술가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대중들에게 체화되고 대중들이 예술을 품어안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다큐에서 본 바에 의하면 여전히 진도아리랑은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이고, 또한 대중들 사이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진도의 중년여성들을 중심으로 합창단이 만들어져서 공연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왠만한 집에 장구는 하나씩 있는 것 같고, 장구채를 잡으면 시원스럽고 멋들어지게 진도아리랑을 불러주는 것 같습니다. 서양의 전통음악은 classic이 되어서 지금도 연주되는 레파토리인데 한국의 전통음악은 보호받아야 하는 문화유산같은 면이 강하죠. 국악이라는 명사도 저는 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통음악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포기하고 한국의 음악을 지역적으로 부당하게 한계설정한 것이라고 보거든요. 판소리가 세계의 음악이 되었다고 가정하는 순간 '국악'과는 부조화하거든요. 그래서 저는국악이라는 단어보다는 전통음악이라는 개념을 선호합니다. 요즈음의 젊은 전통음악의 예술인들이 부단히 전통음악을 현재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도에서는 전통음악이 '전통'이라는 단어가 불필요한 보다 보통명사로서 음악 그것도 대중음악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전통음악에 무형문화재 자격을 주는 것도 사실은 그만큼 그 위상이 불안정하다는 것이고 즐기는 계층이 한정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진도처럼 전통음악이 대중음악이라면 굳이 문화재 지정을 해야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이렇게 진도는 한국의 전통예술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상한 유적으로서의 남도의 문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남도문화(어떤 면에서는 전통문화 전체)를 접하고 싶다면 바로 진도를 가봐야 하겠죠.
이렇게 진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진도로 향하긴 했지만, 애정의 일단이나마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습니다. 운림산방은 월요일엔 쉰다고 하구요, 그럼 딱히 어딜 가야할지도 불분명했고, 다만 진도 국립남도국악원과 인근의 아리랑문화단지가 지도상에 있어서 막연하게 그곳을 방문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죠.
해남에서 진도로 넘어가는 길이 진도대교인데, 진도대교는 바로 명랑해전이죠. 명랑보다는 울돌목이 훨씬 더 그 지역적 특징을 직관적으로 잘 표현해준다 싶습니다. 소용돌이가 거센 물길목에서 이순신이 명랑해전을 이끌었죠. 명랑해전은 '소신은 아직은 13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아뢰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임한 곳입니다. 명랑해전과 이순신이라는 극히 우연적인 사건이 임진왜란 전체에 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정치지형에 엄청난 영향을 남기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명랑해전이 가장 극적인 역사적 순간으로 기억되구요. 진도대교 못 미쳐서 충무사가 있고 우수영관광지가 있습니다. 좌수영이 한산도(통영)에 있었고 우수영은 해남에 설치된 것이죠. 들러보고 싶었지만 이미 시간을 많이 까먹어서 그냥 위치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도대교 다리 전후 입구에 1m 남짓한 이순신 동상은 없느니만 못했습니다. 품격에 맞질 않으니까 오히려 이순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진도대교를 지나서 제법 내려가서 남쪽바다에 자리한 국립남도국악원에 도착합니다. 진도에 가기 전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사후에 검색을 해보니까, 국립국악원 산하에 국립부산국악원, 국립민속국악원(남원) 등이 세워져 있더군요. 이들 중에서 역시 가장 멋진 명칭은 진도의 남도국악원이다 싶어요. '남도'라는 단어가 이미 예술을 한껏 머금고 있거든요.(홈페이지의 주소는 아예 남도입니다. www.namdo.go.kr 남도라는 단어에 대한 자부심이 확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남도국악원이 바로 남도문화가 현재형인 진도에 있으니까 이렇게 명칭과 성격, 그리고 위치가 완벽하게 궁합을 이루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서울 중심의 한국의 기준에서는 진도는 멀고도 먼 곳인데, 진도에서도 더 남쪽 바다에 아늑하게 감싸인 곳에 국가의 기간시설을 만든 그 과감한 결정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워낙에 풍광이 좋은 위치에 그리고 지역의 특징에 딱 맞아떨어지는 남도국악원을 세우게 되서인지 디자인도 참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그 자체로 고립된 기술처럼 좁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디자인 이전에 건축하고자 하는 건물의 성격과 명칭이 이미 디자인의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좋은 성격과 좋은 명칭을 가지고 있는 건물은, 또 그것이 현실화되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주관하는 한, 좋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디자이너들은 많거든요. 그러한 좋은 디자이너가 정말로 좋은 건축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취지와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되거든요. 공연장(진악당(珍樂堂)이 이름인데 이름도 멋지네요. 진도의 진도 같은 한자이구요)과 학습하는 공간이 전면에 있고, 배후에는 야외공연장과 숙소와 식당이 갖춰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공연장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습장(연습동)으로서의 역할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들 참 아름다운 건물들인데, 특히 공연장은 칭찬해마지않을 수가 없습니다(아래 사진). 건물만으로 공간을 좁히지 않고, 건물 외곽에 파르테논 신전처럼 기둥들이 경건하게 건물을 보호하게끔 공간을 입체화했습니다. 이러한 신전같은 건축물이 더군다나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있으니까, 무한한 신비감을 느끼게 합니다. 아주 시원스럽기도 하구요. 안개가 많이 끼여서 건물들이 안개에 쌓여있었는데 그것도 아주 성스러운 숨어있는 공간같에서 좋았습니다. 날이 맑은 날은 먼 푸른 바다를 내다보면서 웅지를 북돋아 줄 것 같아서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통음악하면 고립된 것으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남도국악원의 디자인은 열려있고 그리고 세계를 품는 야심을 전해줍니다.
국악당만 덩그러니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도 좋았습니다. 그 옆의 연습동에는 마침 교사들의 음악교육 워크샵도 있고, 아마도 전통음악의 학생들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예술이 그 현장성에서 빛나듯이, 전통음악도 옆에서 시원하게 노랫자락 한번 들으면 그 맛이 남다릅니다.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국악'은 좋기는 하지만 오히려 박제화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한된 전기 주파수로는 그 맛을 전해주기 어렵습니다. 역시 현장에서 들어야 합니다. 본격적인 공연은 아니지만, 언뜻언뜻 들리는 노랫소리가 그래서 좋았구요. 그리고 또 청년들이 이렇게 전통음아게 심취해 있는 모습도 참 아름다왔습니다.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공연은 아니지만, 마치 해외의 한국인입양가족들의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행사준비를 하는 듯했어요. 비록 찾아오기에 먼 곳이지만, 그 가족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잘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잘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남도국악원의 약점은 지리적인 것일 것 같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의 자체 주관 공연 외에는 이렇다할 공연스케줄이 없더라구요. 이게 한국의 지역문화를 활발하게 전개하는데(굳이 문화산업이라고 의식하지 않을지라도) 일반적으로 닥친 문제들입니다. 서울에서도 사실은 좋은 공연임에도 당일 가면 티켓을 살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뉴욕이나 런던은 몇달 전 예매가 그리 낯설지 않거든요). 게다가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관객층의 범위는 현저하게 줄어들죠. 이것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가계의 문화적 지출이 많아지게도 해야 할뿐만 아니라, 지역별로 적절한 인구분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화는 배달이 되는 상품이 아니죠. 현장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리적 성격이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좋은 문화가 창출되기 위해서는 그 인구의 규모가 일정한 사이즈(critical mass)를 넘어서야 합니다. 한국은 국토의 왼쪽 구탱이에 너무나도 많은 고급의 소비인구가 몰려 있는 것이죠. 이쪽은 critical mass를 불필요하게 넘어서고 있구요(이 지역의 문화소비의 문제는 한국 가계의 일반적인 문화지출의 낮는 수준의 문제이구요), 여타 지역은 인구 그 자체의 빈약함 때문에 의욕적인 시도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침 몇 분의 관광객들(어조로 봐서는 진도나 아님 전남분들, 역시 전통문화는 남도에서 현재형입니다)도 우연히 들른듯한데, 공연 스케줄이 없으니까 아쉬어 하더군요. 공연문화가 활발하기 위해서는 왠만한 공연장은 거의 매일 공연이 열리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남도국악원 앞의 아리랑문화단지는 아직 조성중이더군요. 상징물 등을 봤을 때 약간은 국악원의 품격에 미치지 못하는 저가 놀이공원이 되지는 않을런지 걱정이 됩니다. 국악원에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남진미술관과 운림산방을 순서대로 들렀습니다. 남진(南辰)미술관은 가수 남진과 관계가 있나 억측을 했었는데 역시 억측이었구요, 서예가인 고 장전 하남호가 자신과 부인의 이름에서 딴 명칭입니다. 개인이 아담한 3층 양옥 건물에 미술관을 세운 것도 참 경탄할만합니다.(통상 우리가 흔히 이럴 때 말하죠, '이런 시골에!') 그리고 원래의 한옥 가옥은 지금도 거주하는 공간인데 아주 아름답더군요. 南辰門이란 현판이 붙은 집의 대문도 그러하구요(아래 사진). 제가 미술관의 전시물들에 대해 안목이 없다보니끼 미학적인 판단은 하기 어렵고 다만 김정희, 윤두서, 민영환, 김옥균 같은 유명한 이들의 작품이 있었다는 것 정도로 흡족합니다. 원래 월요일은 휴관일인데 다른 사정이 있어서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문을 열어준 분은 장전의 막내아들인데 역시 조각을 전공한다고 합니다. 예술적 재능과 관심은 그렇게 내리 물려지는 가봅니다.
장전미술관을 나와서 운림산방으로 향했는데 긴가민가했습니다. 군청에서 관리하기 때문인지 아예 전화연락이 안되었구요. 월요일은 휴관이라고 하는데 멀치감치서 건물이나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들렸습니다(여행할 때는 스마트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살 생각은 없지만요. 우연성과 불가측성이 주는 즐거움도 여행의 중요한 요소라서). 아, 운림산방을 도착하는 순간, 안 왔더라면 후회할뻔했다 싶었습니다. 소치미술관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운림산방은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운림산방과 그 앞의 연못이 기가 막히더군요(아래 사진). 제가 정원과 같은 정적인 것엔 관심이 없음에도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습니다. splendid beauty! 이 연못과 배경은 저만 몰랐지 유명하더군요. 영화 스캔들에서 연못에서 선비들이 노는 장면도 요 장면이었구요(영화 봤는데, 그때 저런 멋진 곳도 있나 싶었었죠) 운림산방은 운림산방 현판이 붙은 기와집도 멋지구요(그림에서 보이는). 그 뒤켠의 초가집도 예술입니다(아래의 아래 그림). 그리고 오른편의 전시관(한옥 디자인)도 멋들어집니다. 일반적인 한옥과 달리, 역시 회랑과 기둥 디자인을 채용했는데 이 디자인도 건물의 권위를 높여주고 또한 시각적으로 시원합니다 (아래의 아래의 아래 그림. 회랑에서 각을 잡았습니다). 제가 왠만해서는 이렇게 사진을 남용할 생각이 없는데 운림산방만큼은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멋진 곳이 여행스케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지만 드라마같습니다. 일부러 이렇게 기획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예기치 않는 행운을 가슴에 품은 채 이렇게 남도 기행을 마치고 생활인의 공간 서울로 회귀합니다. 광주를 지나서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생활인의 본성이 여지 없이 드러납니다. 빠른게 최고죠.
4. 남도는 역시 남도다
비록 어렸을 적 목포를 떠났고 그 이후, 딱 하루의 광주 방문, 그리고 이번의 여행이 다이지만, 저에게 호남은 또는 남도는 정서의 안식처입니다. 아버지는 목포-함평이 고향이고 어머니는 고창이 고향이니까 빼도박도 못한 호남권의 후예죠. 저에겐 당연하게도 호남의 사투리나 억양이 참 정겹습니다. 저에게 지금도 일부 남아 있죠. 제가 그 억양을 좋아해서 굳이 의식적으로 없앨 생각이 없었죠. 똑같은 문장이라도 호남의 억양으로 말하면 공격성은 없어지고 애한과 정으로 다가오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한때는 무식해보이는 억양으로 치부되기 해서 방송드라마에서 그 상징성을 잘 활용한 적이 있죠. 어릴 적에 무의식적으로 접해보거나 들어본 노래가 나이가 드면서 얼마나 더 선명해지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지나가듯이 들어본 판소리와 민요들이 나이가 들면서 그 미학에 빠져들게 되니까요. 유년시절에 각인된 문화는 비록 공간적으로 멀어질지언정 단절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뿌리들이 더 왕성하게 자라서 한 사람의 인격을 구조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문화의 창조자이지만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약간씩 덧붙이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리고 그 덧붙임이라는 것도 기존 문화와의 원활한 접점하에서만 가능한 게 아닐런지요. 그래서 인간은 문화의 포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왕에 그렇다면 저는 문화예술이 넘쳐흐르는 호남의 문화권에 포로가 되어 있다면 그또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호남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음으로 해서 호남은 저에게 추상적이기도 했습니다. 남도문화라는 단어는 너무 멋지지만, 현장성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혹시 예술적 취향이 고고한 일부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런지, 자치 지역 마케팅 차원의 과장된 표현은 아닐런지 하는 걱정도 가지고 있었죠. 현실은 관념과는 달리 무관심한 일상이기 쉽거든요. 그래서 환상을 좌절시켜버리는 냉정함의 이면을 갖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제가 마음속으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확인해본 '추상적 남도'는 '구체적으로도 남도'였습니다. 권력에의 의지 또는 유학자의 목표이자 임무인 현실에서의 경세도 포기했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은 남도에서 그 자유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러면서도 애민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현실주의를 품었죠. 그들의 지향이 거칠고 교조화된 말기 조선에서는 구현되기는 어려웠고, 자칫 화라도 당하기 쉬어서, 그들은 불가피하게 은거하면서 문화예술에 재능과 열정을 집중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로서는 이것은 은둔이었을 것이고 패배자의 subculture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조선 후기가 그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팍팍했을까 아찔하죠. 그들 역시 조선과 함께 좌절했지만, 그래도 조선과 현대를 이어주는 그러한 고리가 될 수 있었죠. 현대사회의 자유발랄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지식인들은 그들이었으니까요.
남도의 문화를 지식인들이 만들어내고 민중들은 따라만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남도의 민중들이 유흥준이 비판한 것처럼 별로 의미도 모른 채 다소 겉멋으로 문인화들을 걸어두었을지언정, 저는 그것마저도 남도의 민중의 문호적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서 멀어진 지식인들을 존경하고 품어준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남도의 민중은 지식인들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문화예술을 꽃피웠고 여전히 즐기고 있습니다. 진도에 가면 밭에서 일하는 아무 아주머니도 시키기만 하면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펼쳐 놓습니다. 우연치 않게도, 영화 <서편제>의 유명한 롱테이크였던 진도아리랑이 불려진 곳도 완도군의 남쪽 섬인 청산도라고 하는 군요. 남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물론 사대부이도 했지만, 예술에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서편제에 보면, 부자집에서 소리꾼을 초대해서 노래를 하면, 그것은 이미 마을의 공공재였던 것이죠.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서 즐겼던 것입니다. 저도 유년 시절에 사람들이 소릿꾼이 오면 다 찾아가서 즐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밝은 사람은 많이 외우기도 했구요. 저희 할머니가 기억력이 좋았는데, 많은 부분을 외었던 것 같습니다.(저는 어렷을 때 무심히 들은 할머니의 성주풀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습니다. 성주풀이는 경상도 민요라고 하네요) 익산의 양반가문(그것도 안동 권씨 집안) 출신이었던 권삼득은 판소리한다고 해서 가문에서 죽일려고 했는데, 마지막 노래 한 마디 부르게해달라고 해서 불렀는데 하도 처연하고 감동적이어서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고 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생을 방랑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호남의 민중들이 만들어내고 보존한게 속악의 정수인 판소리죠. 속악이라는 것은 궁중음악과에 비해 뒤떨어지는 음악으로 개념화된 것이지만, 시대가 지나니가, 그 속악은 여전히 대중속에 살아 있지만, 궁중음악은 사실은 아직은 한국문화탐방프로그램에서 '공부하기' 위해 접하는 것이죠. 판소리는 속악이면서도 음악형식미가 갖춰진 독보적인 음악(그래서 세계적인, 미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미국인 친구가 판소리를 처음 듣고서 마법처럼 빨려든 경험을 겪었다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이지만 그외에 많은 민요들이 만들어지고 계승되어진 곳이 또한 남도입니다. 다 민중들이 그 문화의 동력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이처럼 악보도 없이 전해진 민속음악들이 생명력이 엄청납니다. 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 매력이 있었겠죠. 집시의 음악으로 천대받았던 플라멩코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민속음악으로 자리잡았죠. 스페인 각지의 지명에 따라 플라멩코들이 있는데, 한국의 아리랑과 참 비슷합니다. 간단한 주제멜로디가 있는데 여기에 가사들이 덧붙여지고 또한 지역적으로 각각의 감성에 맞춰서 발전하구요. 플라멩카는 왠만한 세계인은 알지만 아리랑을 아는 세계인은 소수이겠죠. 그런데 제 생각엔 아리랑도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뉴욕필이 로린마젤과 함께 북한에서 공연할 때 청중을 위해서 특별히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죠. 북한의 작곡가가 편곡한 곡이었는데 교황곡으로도 훌륭하더군요.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왔습니다.
예술을 품은 지방, 태생적으로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호남이 20세기 한국에서 그 정치적인 측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발주의 박정희와 대척점에 선 자유주의자 김대중이 호남에서 배출되었고, 또한 가장 헌신적으로 군부독재에 저항한 곳이 또한 호남입니다. 남도의 문화예술전통은 그 인문적 지향성으로 인해,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기제에 대해 보다 저항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혁명과 예술은 참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단어이죠. 비록 짧은 기간의 스케치와 같은 여행이었지만 이러한 남도의 문화예술과 그 자유주의적 정치지향이 모두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경험을 해서 너무나도 행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있게 '남도는 역시 남도다'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제 남도는 그 오랫동안의 헌신에 대해 열매를 따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같은 호남출신이 콤플렉스 없이 남도에 열광하는 것이 이미 시대의 변화라는 필연의 우연적 발현일 수 있습니다. 이미 공업(산업)이 개발국가를 대표한다면, 문화가 후기산업사회는 문화가 이끕니다. 그 문화는 인간을 지향하는 억압에 저항하는 인문정신이 없다면 박제품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도는 문화를 융성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스스로 배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처절한 자기의 단련의 시기를 감수했던 것이지요. 남도의 후손들은 선조의 희생을 이제 온전히 영광으로 꽃피울 자격과 의무가 있습니다. 아시아 문화 중심도시라는 단어는 사실은 거부감을 주지만, 그 내용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의 잠재력을 광주(그리고 남도)는 대변할 자격이 있습니다. 광주 그리고 남도가 아시아의 빛나는 문화예술의 고장을 자리매김할 것을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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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날 아침에 안동/양동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이로서 한국은 10개의 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너무나도 반가왔습니다. 별 것 아닌 드하지만, 이러한 상징물들이 있으면 한국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게끔 돕는데 참 도움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가리치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딱딱한 연대기보다는 세계문화유산 중심으로 설명을 하니까, 청소년들이 쉽고 재밌어하고 또 자부심을 갖더라구요.
한국의 전통문화에 있어서 남도가 문화예술을 대표한다면 안동/양동은 학문지성을 대표하죠. 전자가 낭만적, 감성적, 파토스(에토스)적이라면 후자는 논리적, 지성적, 로고스적이죠. 저는 제 자신의 기질은 전자쪽이지만, 후자도 무척이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 개인의 인격이나 사회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한다고 생갃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또다른 중요한 한 축이 그 의의를 공식적으로 추인 받게 되고, 그만큼 대중이 이해를 높이게 될 수 있다는 점은 참 고마울 뿐이죠. 문화유산에 등재에 상관없이 안동/양동은 세계문화사에 그 의의가 뚜렷한 지역입니다. 중국을 포함한 다른 유교문화권에서 이처럼 유학적 전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지역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유성룡 고택인 충효당에 하룻밤을 묵었을 때도 사랑채=남자, 안채=여자의 공식을 바꾸지 않은 곳입니다. 아마도 남도의 명문가는 달랐을지도 모르죠. 지나친 격식과 공식은 억압적이지만, 인간에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격식은 사회의 기강을 유지하는 뼈대의 역할을 하죠. 저는 안동/양동의 가문들은 이미 그러한 격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도 훨씬 어려운 수준까지도 스스로 희생과 헌신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령 엘리자베스 여왕을 안채에 모셨어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러한 격식(code)에 익숙한 여왕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겠구요. 공자가 '여기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예인가"하는 질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 예이다'라고 답합니다(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표현은 다분히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느낌을 주지만, 공자의 이 짧은 문답이 예의 상호성의 핵심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더 수준 높고 감동적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러한 예를 구현한 것이죠. 그리고 그런 점이 매력적이어서 안동/양동을 방문한 것이겠죠. 예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겠지만, 지나치지 않는 범위에서 예를 지켜가는 그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만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지켜가는 것, 그것이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보수-개혁/진보와 같은 대립구도가 어지러운 듯하지만, 사실은 20세기 한국은 기본적으로는 개혁 또는 과거 부정의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패망과 일본에의 강제병합으로 인해, 조선의 정신과 관습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던(조선은 망했지만, 가문으로 내려오는 유학적 전통은 엄중한 것이었죠) 구 양반가문의 후손들은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볼 수 있죠. 유학, 조선, 양반 이 모든 것들에 공격의 화살이 몰렸으니까요. 저는 이러한 과거에 대한 처절한 부정이 한국을 급속하게 근대화시키는데 기여했지만, 그만큼 지나치게 과거와의 단절(단절될 수도 없는데)은 한국사람에게 있어 주체의 공허로 귀결되었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체가 공허하면 타자와 대등하게 대면할 수 없죠. 세계 속의 당당한 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 국가의 개성이 명백해야 합니다(명필은 남의 글씨 모방해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죠). 그런 점에서 저는 오히려 지금에는 '보수'의 복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보수는 통상 신문지면이나 관념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이 내면화된 그러한 보수일 것입니다(이게 또한 보수의 원래 정의죠). 그리고 그러한 보수의 모델은 저는 안동/양동의 가문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육사의 생가에 갔을 때 이육사가 이황의 14대 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보수'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안동/양동의 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는 것은 인정을 받았다는 측면보다는 그것을 잘 지켜나가겠다는 결의의 측면에서 오히려 더 높게 평가합니다. 관념적으로 전통문화는 아름답지만, 현실의 다단한 이해 앞에서는 무력해지기 쉽거든요. 안동-양동은 몇 년전에 스치듯이 지나가기만 했습니다. 역시 한옥들 담들은 아름다왔고, 해지고 난 뒤의 어두움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좀더 현장성을 담을 기회를 갖고서 여기에 대해서도 아마 장광설을 쏟아놓게 될 것 같습니다(지금도 좀 길군요). 저는 이 지역에 대해서도 다만 문화적 취향으로서가 현실적인 경제적 매력 또는 가치가 엄청나다고 보고 있거든요.
긴 남도기행문을 이렇게 종결합니다. 이렇게 글을 남겨두면 속이 후련한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여행하기가 무섭기도 합니다.(ㅎㅎㅎ). 그래도 독서리뷰 같은 상대적으로 더 지적인 작업보다는 이러한 감상문이 훨씬 자연스럽네요. 좀더 지적인 작업을 할 때는 머리에 열이 뻗쳐서 머리 빠지는 것 걱정해야 하는데, 감상문을 쓸 때는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 직업을 바꿔야 할런지요(ㅎㅎㅎ).
3. 진도, 전통문화가 여전히 대중문화인 곳
이미 반나절이 지나서야 진도로 출발했고 또 당일 서울로 돌아올 요량이었으므로, 진도의 여러곳을 둘러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꼭 진도에서 확인하고 싶은 바가 있습니다. 현재진형형으로서의 진도의 전통예술입니다. 진도는 조그마한 섬인데도, 한국의 전통예술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남다릅니다. 윤두서의 그림에 깊은 감명을 받아 화풍을 배우고, 김정희로부터도 사사한 소치 허련(남종화의 거장, 남종화는 중국에서 연유하여 문인들의 사색적인 세계를 그려낸 화풍)의 운림산방이 이곳 진도에 묵직하게 자리한 곳이죠. 또한 진도아리랑과 육자배기, 강강수월래가 여전히 현재진형형인 곳입니다. 진도의 예술적 전통은 일부 문인이나 직업적 예술가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대중들에게 체화되고 대중들이 예술을 품어안고 살아가는 곳입니다. 다큐에서 본 바에 의하면 여전히 진도아리랑은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이고, 또한 대중들 사이에 전승되고 있습니다. 진도의 중년여성들을 중심으로 합창단이 만들어져서 공연을 하는 것을 본 적도 있습니다. 왠만한 집에 장구는 하나씩 있는 것 같고, 장구채를 잡으면 시원스럽고 멋들어지게 진도아리랑을 불러주는 것 같습니다. 서양의 전통음악은 classic이 되어서 지금도 연주되는 레파토리인데 한국의 전통음악은 보호받아야 하는 문화유산같은 면이 강하죠. 국악이라는 명사도 저는 지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전통음악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을 포기하고 한국의 음악을 지역적으로 부당하게 한계설정한 것이라고 보거든요. 판소리가 세계의 음악이 되었다고 가정하는 순간 '국악'과는 부조화하거든요. 그래서 저는국악이라는 단어보다는 전통음악이라는 개념을 선호합니다. 요즈음의 젊은 전통음악의 예술인들이 부단히 전통음악을 현재화시키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진도에서는 전통음악이 '전통'이라는 단어가 불필요한 보다 보통명사로서 음악 그것도 대중음악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죠. 전통음악에 무형문화재 자격을 주는 것도 사실은 그만큼 그 위상이 불안정하다는 것이고 즐기는 계층이 한정되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진도처럼 전통음악이 대중음악이라면 굳이 문화재 지정을 해야할 이유도 없는 것이죠. 이렇게 진도는 한국의 전통예술에 있어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고상한 유적으로서의 남도의 문화가 아니라, 살아 있는 남도문화(어떤 면에서는 전통문화 전체)를 접하고 싶다면 바로 진도를 가봐야 하겠죠.
이렇게 진도에 대한 애정을 품고 진도로 향하긴 했지만, 애정의 일단이나마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습니다. 운림산방은 월요일엔 쉰다고 하구요, 그럼 딱히 어딜 가야할지도 불분명했고, 다만 진도 국립남도국악원과 인근의 아리랑문화단지가 지도상에 있어서 막연하게 그곳을 방문하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죠.
해남에서 진도로 넘어가는 길이 진도대교인데, 진도대교는 바로 명랑해전이죠. 명랑보다는 울돌목이 훨씬 더 그 지역적 특징을 직관적으로 잘 표현해준다 싶습니다. 소용돌이가 거센 물길목에서 이순신이 명랑해전을 이끌었죠. 명랑해전은 '소신은 아직은 13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이순신이 선조에게 아뢰고 비장한 각오로 전쟁에 임한 곳입니다. 명랑해전과 이순신이라는 극히 우연적인 사건이 임진왜란 전체에 그리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북아의 정치지형에 엄청난 영향을 남기죠. 그래서 우리에게는 명랑해전이 가장 극적인 역사적 순간으로 기억되구요. 진도대교 못 미쳐서 충무사가 있고 우수영관광지가 있습니다. 좌수영이 한산도(통영)에 있었고 우수영은 해남에 설치된 것이죠. 들러보고 싶었지만 이미 시간을 많이 까먹어서 그냥 위치만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도대교 다리 전후 입구에 1m 남짓한 이순신 동상은 없느니만 못했습니다. 품격에 맞질 않으니까 오히려 이순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진도대교를 지나서 제법 내려가서 남쪽바다에 자리한 국립남도국악원에 도착합니다. 진도에 가기 전엔 이런 곳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사후에 검색을 해보니까, 국립국악원 산하에 국립부산국악원, 국립민속국악원(남원) 등이 세워져 있더군요. 이들 중에서 역시 가장 멋진 명칭은 진도의 남도국악원이다 싶어요. '남도'라는 단어가 이미 예술을 한껏 머금고 있거든요.(홈페이지의 주소는 아예 남도입니다. www.namdo.go.kr 남도라는 단어에 대한 자부심이 확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 남도국악원이 바로 남도문화가 현재형인 진도에 있으니까 이렇게 명칭과 성격, 그리고 위치가 완벽하게 궁합을 이루는 믿을 수 없는 놀라운 현실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입니다. 서울 중심의 한국의 기준에서는 진도는 멀고도 먼 곳인데, 진도에서도 더 남쪽 바다에 아늑하게 감싸인 곳에 국가의 기간시설을 만든 그 과감한 결정에 무한한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워낙에 풍광이 좋은 위치에 그리고 지역의 특징에 딱 맞아떨어지는 남도국악원을 세우게 되서인지 디자인도 참 좋았습니다. 사람들은 디자인을 그 자체로 고립된 기술처럼 좁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디자인 이전에 건축하고자 하는 건물의 성격과 명칭이 이미 디자인의 방향성을 결정합니다. 좋은 성격과 좋은 명칭을 가지고 있는 건물은, 또 그것이 현실화되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주관하는 한, 좋은 디자인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좋은 디자이너들은 많거든요. 그러한 좋은 디자이너가 정말로 좋은 건축디자인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좋은 취지와 좋은 사람들이 있으면 되거든요. 공연장(진악당(珍樂堂)이 이름인데 이름도 멋지네요. 진도의 진도 같은 한자이구요)과 학습하는 공간이 전면에 있고, 배후에는 야외공연장과 숙소와 식당이 갖춰져 있습니다. 일반적인 공연장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습장(연습동)으로서의 역할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다들 참 아름다운 건물들인데, 특히 공연장은 칭찬해마지않을 수가 없습니다(아래 사진). 건물만으로 공간을 좁히지 않고, 건물 외곽에 파르테논 신전처럼 기둥들이 경건하게 건물을 보호하게끔 공간을 입체화했습니다. 이러한 신전같은 건축물이 더군다나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있으니까, 무한한 신비감을 느끼게 합니다. 아주 시원스럽기도 하구요. 안개가 많이 끼여서 건물들이 안개에 쌓여있었는데 그것도 아주 성스러운 숨어있는 공간같에서 좋았습니다. 날이 맑은 날은 먼 푸른 바다를 내다보면서 웅지를 북돋아 줄 것 같아서 그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전통음악하면 고립된 것으로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남도국악원의 디자인은 열려있고 그리고 세계를 품는 야심을 전해줍니다.
국악당만 덩그러니 있지 않고 그 안에서 사람들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도 좋았습니다. 그 옆의 연습동에는 마침 교사들의 음악교육 워크샵도 있고, 아마도 전통음악의 학생들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예술이 그 현장성에서 빛나듯이, 전통음악도 옆에서 시원하게 노랫자락 한번 들으면 그 맛이 남다릅니다. 텔레비전에서 전하는 '국악'은 좋기는 하지만 오히려 박제화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한된 전기 주파수로는 그 맛을 전해주기 어렵습니다. 역시 현장에서 들어야 합니다. 본격적인 공연은 아니지만, 언뜻언뜻 들리는 노랫소리가 그래서 좋았구요. 그리고 또 청년들이 이렇게 전통음아게 심취해 있는 모습도 참 아름다왔습니다.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공연은 아니지만, 마치 해외의 한국인입양가족들의 프로그램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열심히 행사준비를 하는 듯했어요. 비록 찾아오기에 먼 곳이지만, 그 가족들은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잘 한국의 맛을 느낄 수 있는 곳에 잘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남도국악원의 약점은 지리적인 것일 것 같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의 자체 주관 공연 외에는 이렇다할 공연스케줄이 없더라구요. 이게 한국의 지역문화를 활발하게 전개하는데(굳이 문화산업이라고 의식하지 않을지라도) 일반적으로 닥친 문제들입니다. 서울에서도 사실은 좋은 공연임에도 당일 가면 티켓을 살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뉴욕이나 런던은 몇달 전 예매가 그리 낯설지 않거든요). 게다가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관객층의 범위는 현저하게 줄어들죠. 이것이 극복되기 위해서는 가계의 문화적 지출이 많아지게도 해야 할뿐만 아니라, 지역별로 적절한 인구분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문화는 배달이 되는 상품이 아니죠. 현장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리적 성격이 크게 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좋은 문화가 창출되기 위해서는 그 인구의 규모가 일정한 사이즈(critical mass)를 넘어서야 합니다. 한국은 국토의 왼쪽 구탱이에 너무나도 많은 고급의 소비인구가 몰려 있는 것이죠. 이쪽은 critical mass를 불필요하게 넘어서고 있구요(이 지역의 문화소비의 문제는 한국 가계의 일반적인 문화지출의 낮는 수준의 문제이구요), 여타 지역은 인구 그 자체의 빈약함 때문에 의욕적인 시도를 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침 몇 분의 관광객들(어조로 봐서는 진도나 아님 전남분들, 역시 전통문화는 남도에서 현재형입니다)도 우연히 들른듯한데, 공연 스케줄이 없으니까 아쉬어 하더군요. 공연문화가 활발하기 위해서는 왠만한 공연장은 거의 매일 공연이 열리는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남도국악원 앞의 아리랑문화단지는 아직 조성중이더군요. 상징물 등을 봤을 때 약간은 국악원의 품격에 미치지 못하는 저가 놀이공원이 되지는 않을런지 걱정이 됩니다. 국악원에서 다시 돌아오는 길에 남진미술관과 운림산방을 순서대로 들렀습니다. 남진(南辰)미술관은 가수 남진과 관계가 있나 억측을 했었는데 역시 억측이었구요, 서예가인 고 장전 하남호가 자신과 부인의 이름에서 딴 명칭입니다. 개인이 아담한 3층 양옥 건물에 미술관을 세운 것도 참 경탄할만합니다.(통상 우리가 흔히 이럴 때 말하죠, '이런 시골에!') 그리고 원래의 한옥 가옥은 지금도 거주하는 공간인데 아주 아름답더군요. 南辰門이란 현판이 붙은 집의 대문도 그러하구요(아래 사진). 제가 미술관의 전시물들에 대해 안목이 없다보니끼 미학적인 판단은 하기 어렵고 다만 김정희, 윤두서, 민영환, 김옥균 같은 유명한 이들의 작품이 있었다는 것 정도로 흡족합니다. 원래 월요일은 휴관일인데 다른 사정이 있어서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문을 열어준 분은 장전의 막내아들인데 역시 조각을 전공한다고 합니다. 예술적 재능과 관심은 그렇게 내리 물려지는 가봅니다.
장전미술관을 나와서 운림산방으로 향했는데 긴가민가했습니다. 군청에서 관리하기 때문인지 아예 전화연락이 안되었구요. 월요일은 휴관이라고 하는데 멀치감치서 건물이나 볼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들렸습니다(여행할 때는 스마트폰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살 생각은 없지만요. 우연성과 불가측성이 주는 즐거움도 여행의 중요한 요소라서). 아, 운림산방을 도착하는 순간, 안 왔더라면 후회할뻔했다 싶었습니다. 소치미술관은 들어갈 수 없었지만, 운림산방은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운림산방과 그 앞의 연못이 기가 막히더군요(아래 사진). 제가 정원과 같은 정적인 것엔 관심이 없음에도 정신이 아득할 정도였습니다. splendid beauty! 이 연못과 배경은 저만 몰랐지 유명하더군요. 영화 스캔들에서 연못에서 선비들이 노는 장면도 요 장면이었구요(영화 봤는데, 그때 저런 멋진 곳도 있나 싶었었죠) 운림산방은 운림산방 현판이 붙은 기와집도 멋지구요(그림에서 보이는). 그 뒤켠의 초가집도 예술입니다(아래의 아래 그림). 그리고 오른편의 전시관(한옥 디자인)도 멋들어집니다. 일반적인 한옥과 달리, 역시 회랑과 기둥 디자인을 채용했는데 이 디자인도 건물의 권위를 높여주고 또한 시각적으로 시원합니다 (아래의 아래의 아래 그림. 회랑에서 각을 잡았습니다). 제가 왠만해서는 이렇게 사진을 남용할 생각이 없는데 운림산방만큼은 어쩔 수 없군요. 이렇게 멋진 곳이 여행스케줄의 마지막이었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지만 드라마같습니다. 일부러 이렇게 기획하기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런 예기치 않는 행운을 가슴에 품은 채 이렇게 남도 기행을 마치고 생활인의 공간 서울로 회귀합니다. 광주를 지나서 고속도로에 접어들면 생활인의 본성이 여지 없이 드러납니다. 빠른게 최고죠.
4. 남도는 역시 남도다
비록 어렸을 적 목포를 떠났고 그 이후, 딱 하루의 광주 방문, 그리고 이번의 여행이 다이지만, 저에게 호남은 또는 남도는 정서의 안식처입니다. 아버지는 목포-함평이 고향이고 어머니는 고창이 고향이니까 빼도박도 못한 호남권의 후예죠. 저에겐 당연하게도 호남의 사투리나 억양이 참 정겹습니다. 저에게 지금도 일부 남아 있죠. 제가 그 억양을 좋아해서 굳이 의식적으로 없앨 생각이 없었죠. 똑같은 문장이라도 호남의 억양으로 말하면 공격성은 없어지고 애한과 정으로 다가오는 신비한 힘이 있습니다. 한때는 무식해보이는 억양으로 치부되기 해서 방송드라마에서 그 상징성을 잘 활용한 적이 있죠. 어릴 적에 무의식적으로 접해보거나 들어본 노래가 나이가 드면서 얼마나 더 선명해지는지 놀랄 정도입니다. 지나가듯이 들어본 판소리와 민요들이 나이가 들면서 그 미학에 빠져들게 되니까요. 유년시절에 각인된 문화는 비록 공간적으로 멀어질지언정 단절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뿌리들이 더 왕성하게 자라서 한 사람의 인격을 구조화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문화의 창조자이지만 얼마나 새로운 것인지는 의문입니다. 약간씩 덧붙이는 것은 아닐런지요. 그리고 그 덧붙임이라는 것도 기존 문화와의 원활한 접점하에서만 가능한 게 아닐런지요. 그래서 인간은 문화의 포로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기왕에 그렇다면 저는 문화예술이 넘쳐흐르는 호남의 문화권에 포로가 되어 있다면 그또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너무 오랫동안 호남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음으로 해서 호남은 저에게 추상적이기도 했습니다. 남도문화라는 단어는 너무 멋지지만, 현장성이 결여된 상황에서는 혹시 예술적 취향이 고고한 일부 사람들만이 구사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닐런지, 자치 지역 마케팅 차원의 과장된 표현은 아닐런지 하는 걱정도 가지고 있었죠. 현실은 관념과는 달리 무관심한 일상이기 쉽거든요. 그래서 환상을 좌절시켜버리는 냉정함의 이면을 갖고 있기도 하죠.
하지만, 제가 마음속으로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확인해본 '추상적 남도'는 '구체적으로도 남도'였습니다. 권력에의 의지 또는 유학자의 목표이자 임무인 현실에서의 경세도 포기했거나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들은 남도에서 그 자유주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그러면서도 애민적이고 민족주의적인 현실주의를 품었죠. 그들의 지향이 거칠고 교조화된 말기 조선에서는 구현되기는 어려웠고, 자칫 화라도 당하기 쉬어서, 그들은 불가피하게 은거하면서 문화예술에 재능과 열정을 집중했다고 생각됩니다. 당시로서는 이것은 은둔이었을 것이고 패배자의 subculture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조선 후기가 그들이 없었다면 얼마나 팍팍했을까 아찔하죠. 그들 역시 조선과 함께 좌절했지만, 그래도 조선과 현대를 이어주는 그러한 고리가 될 수 있었죠. 현대사회의 자유발랄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지식인들은 그들이었으니까요.
남도의 문화를 지식인들이 만들어내고 민중들은 따라만 갔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남도의 민중들이 유흥준이 비판한 것처럼 별로 의미도 모른 채 다소 겉멋으로 문인화들을 걸어두었을지언정, 저는 그것마저도 남도의 민중의 문호적 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서 멀어진 지식인들을 존경하고 품어준 사람들이 그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남도의 민중은 지식인들과 무관하게 자신들의 문화예술을 꽃피웠고 여전히 즐기고 있습니다. 진도에 가면 밭에서 일하는 아무 아주머니도 시키기만 하면 진도아리랑을 구성지게 펼쳐 놓습니다. 우연치 않게도, 영화 <서편제>의 유명한 롱테이크였던 진도아리랑이 불려진 곳도 완도군의 남쪽 섬인 청산도라고 하는 군요. 남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은 물론 사대부이도 했지만, 예술에 뛰어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영화 서편제에 보면, 부자집에서 소리꾼을 초대해서 노래를 하면, 그것은 이미 마을의 공공재였던 것이죠. 마을 사람들이 다 몰려서 즐겼던 것입니다. 저도 유년 시절에 사람들이 소릿꾼이 오면 다 찾아가서 즐겼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귀가 밝은 사람은 많이 외우기도 했구요. 저희 할머니가 기억력이 좋았는데, 많은 부분을 외었던 것 같습니다.(저는 어렷을 때 무심히 들은 할머니의 성주풀이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습니다. 성주풀이는 경상도 민요라고 하네요) 익산의 양반가문(그것도 안동 권씨 집안) 출신이었던 권삼득은 판소리한다고 해서 가문에서 죽일려고 했는데, 마지막 노래 한 마디 부르게해달라고 해서 불렀는데 하도 처연하고 감동적이어서 족보에서 이름을 지우고 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생을 방랑하면서 보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호남의 민중들이 만들어내고 보존한게 속악의 정수인 판소리죠. 속악이라는 것은 궁중음악과에 비해 뒤떨어지는 음악으로 개념화된 것이지만, 시대가 지나니가, 그 속악은 여전히 대중속에 살아 있지만, 궁중음악은 사실은 아직은 한국문화탐방프로그램에서 '공부하기' 위해 접하는 것이죠. 판소리는 속악이면서도 음악형식미가 갖춰진 독보적인 음악(그래서 세계적인, 미국에서 친하게 지냈던 미국인 친구가 판소리를 처음 듣고서 마법처럼 빨려든 경험을 겪었다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이지만 그외에 많은 민요들이 만들어지고 계승되어진 곳이 또한 남도입니다. 다 민중들이 그 문화의 동력을 만들어낸 것이지요. 이처럼 악보도 없이 전해진 민속음악들이 생명력이 엄청납니다. 그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든 매력이 있었겠죠. 집시의 음악으로 천대받았던 플라멩코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민속음악으로 자리잡았죠. 스페인 각지의 지명에 따라 플라멩코들이 있는데, 한국의 아리랑과 참 비슷합니다. 간단한 주제멜로디가 있는데 여기에 가사들이 덧붙여지고 또한 지역적으로 각각의 감성에 맞춰서 발전하구요. 플라멩카는 왠만한 세계인은 알지만 아리랑을 아는 세계인은 소수이겠죠. 그런데 제 생각엔 아리랑도 그렇게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뉴욕필이 로린마젤과 함께 북한에서 공연할 때 청중을 위해서 특별히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죠. 북한의 작곡가가 편곡한 곡이었는데 교황곡으로도 훌륭하더군요. 눈물이 흐를 정도로 아름다왔습니다.
예술을 품은 지방, 태생적으로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했던 호남이 20세기 한국에서 그 정치적인 측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개발주의 박정희와 대척점에 선 자유주의자 김대중이 호남에서 배출되었고, 또한 가장 헌신적으로 군부독재에 저항한 곳이 또한 호남입니다. 남도의 문화예술전통은 그 인문적 지향성으로 인해, 인간을 억압하는 사회기제에 대해 보다 저항적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혁명과 예술은 참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단어이죠. 비록 짧은 기간의 스케치와 같은 여행이었지만 이러한 남도의 문화예술과 그 자유주의적 정치지향이 모두 구체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경험을 해서 너무나도 행운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있게 '남도는 역시 남도다'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된 것이죠.
이제 남도는 그 오랫동안의 헌신에 대해 열매를 따는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같은 호남출신이 콤플렉스 없이 남도에 열광하는 것이 이미 시대의 변화라는 필연의 우연적 발현일 수 있습니다. 이미 공업(산업)이 개발국가를 대표한다면, 문화가 후기산업사회는 문화가 이끕니다. 그 문화는 인간을 지향하는 억압에 저항하는 인문정신이 없다면 박제품밖에 되지 않습니다. 남도는 문화를 융성시킬 수 있는 모든 조건들을 스스로 배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처절한 자기의 단련의 시기를 감수했던 것이지요. 남도의 후손들은 선조의 희생을 이제 온전히 영광으로 꽃피울 자격과 의무가 있습니다. 아시아 문화 중심도시라는 단어는 사실은 거부감을 주지만, 그 내용은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시아의 잠재력을 광주(그리고 남도)는 대변할 자격이 있습니다. 광주 그리고 남도가 아시아의 빛나는 문화예술의 고장을 자리매김할 것을 염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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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마지막날 아침에 안동/양동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이로서 한국은 10개의 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너무나도 반가왔습니다. 별 것 아닌 드하지만, 이러한 상징물들이 있으면 한국을 이해하고 또 이해하게끔 돕는데 참 도움이 됩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한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의 역사를 가리치는 봉사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딱딱한 연대기보다는 세계문화유산 중심으로 설명을 하니까, 청소년들이 쉽고 재밌어하고 또 자부심을 갖더라구요.
한국의 전통문화에 있어서 남도가 문화예술을 대표한다면 안동/양동은 학문지성을 대표하죠. 전자가 낭만적, 감성적, 파토스(에토스)적이라면 후자는 논리적, 지성적, 로고스적이죠. 저는 제 자신의 기질은 전자쪽이지만, 후자도 무척이나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 개인의 인격이나 사회체제가 원활하게 작동한다고 생갃합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의 또다른 중요한 한 축이 그 의의를 공식적으로 추인 받게 되고, 그만큼 대중이 이해를 높이게 될 수 있다는 점은 참 고마울 뿐이죠. 문화유산에 등재에 상관없이 안동/양동은 세계문화사에 그 의의가 뚜렷한 지역입니다. 중국을 포함한 다른 유교문화권에서 이처럼 유학적 전통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지역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유성룡 고택인 충효당에 하룻밤을 묵었을 때도 사랑채=남자, 안채=여자의 공식을 바꾸지 않은 곳입니다. 아마도 남도의 명문가는 달랐을지도 모르죠. 지나친 격식과 공식은 억압적이지만, 인간에게 고통스럽지 않다면 격식은 사회의 기강을 유지하는 뼈대의 역할을 하죠. 저는 안동/양동의 가문들은 이미 그러한 격식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남보다도 훨씬 어려운 수준까지도 스스로 희생과 헌신의 전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설령 엘리자베스 여왕을 안채에 모셨어도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그러한 격식(code)에 익숙한 여왕도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겠구요. 공자가 '여기서는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예인가"하는 질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 예이다'라고 답합니다(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라는 표현은 다분히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느낌을 주지만, 공자의 이 짧은 문답이 예의 상호성의 핵심을 짚어준다는 점에서 더 수준 높고 감동적입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그러한 예를 구현한 것이죠. 그리고 그런 점이 매력적이어서 안동/양동을 방문한 것이겠죠. 예의 형식은 시대에 따라 변하겠지만, 지나치지 않는 범위에서 예를 지켜가는 그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만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지켜가는 것, 그것이 보수라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보수-개혁/진보와 같은 대립구도가 어지러운 듯하지만, 사실은 20세기 한국은 기본적으로는 개혁 또는 과거 부정의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의 패망과 일본에의 강제병합으로 인해, 조선의 정신과 관습을 계승할 수밖에 없었던(조선은 망했지만, 가문으로 내려오는 유학적 전통은 엄중한 것이었죠) 구 양반가문의 후손들은 숨죽이며 살아왔다고 볼 수 있죠. 유학, 조선, 양반 이 모든 것들에 공격의 화살이 몰렸으니까요. 저는 이러한 과거에 대한 처절한 부정이 한국을 급속하게 근대화시키는데 기여했지만, 그만큼 지나치게 과거와의 단절(단절될 수도 없는데)은 한국사람에게 있어 주체의 공허로 귀결되었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체가 공허하면 타자와 대등하게 대면할 수 없죠. 세계 속의 당당한 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라면 그 국가의 개성이 명백해야 합니다(명필은 남의 글씨 모방해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죠). 그런 점에서 저는 오히려 지금에는 '보수'의 복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보수는 통상 신문지면이나 관념과는 전혀 다를 것입니다.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이 내면화된 그러한 보수일 것입니다(이게 또한 보수의 원래 정의죠). 그리고 그러한 보수의 모델은 저는 안동/양동의 가문들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이육사의 생가에 갔을 때 이육사가 이황의 14대 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때 '보수'의 무게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안동/양동의 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는 것은 인정을 받았다는 측면보다는 그것을 잘 지켜나가겠다는 결의의 측면에서 오히려 더 높게 평가합니다. 관념적으로 전통문화는 아름답지만, 현실의 다단한 이해 앞에서는 무력해지기 쉽거든요. 안동-양동은 몇 년전에 스치듯이 지나가기만 했습니다. 역시 한옥들 담들은 아름다왔고, 해지고 난 뒤의 어두움은 참 매력적이었습니다. 다음 기회에 좀더 현장성을 담을 기회를 갖고서 여기에 대해서도 아마 장광설을 쏟아놓게 될 것 같습니다(지금도 좀 길군요). 저는 이 지역에 대해서도 다만 문화적 취향으로서가 현실적인 경제적 매력 또는 가치가 엄청나다고 보고 있거든요.
긴 남도기행문을 이렇게 종결합니다. 이렇게 글을 남겨두면 속이 후련한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여행하기가 무섭기도 합니다.(ㅎㅎㅎ). 그래도 독서리뷰 같은 상대적으로 더 지적인 작업보다는 이러한 감상문이 훨씬 자연스럽네요. 좀더 지적인 작업을 할 때는 머리에 열이 뻗쳐서 머리 빠지는 것 걱정해야 하는데, 감상문을 쓸 때는 머리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 직업을 바꿔야 할런지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