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문화 오디세이 추천
(2011.8.30)
2년 전에 “기업문화 오디세이 1”(신상원)이 나와서 엄청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독후감도 쓴 바 있습니다. 최근에 기다리고 있었던 2가 나왔습니다. 전체적인 느낌은 1권에 비해서는 묵직하지는 않다라는 것입니다. 1권에서 워낙 강한 영향을 받아서 이미 기대치가 높아져서 그렇겠죠. 그렇지만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시사점도 풍부하구요.
기업문화라고 하면 기업에 있는 사람의 관심사로 국한시키기 쉽죠. 그리고 기업 자체는 되게 독특하고 신비한 영역으로만 간주되구요(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업에 근무하면서도). 그런데, 저는 기업이 다른 조직에 비해 다를 게 없다고 봅니다. 결국 조직 또는 조직에 대한 reputation이 관건이라는 점에서 모든 조직의 목적은 동일하다고 봅니다. 다만 기업은 합의하기 쉽지 않은 reputation에 대한 평가가 기업의 실적이라는 객관적인 지표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죠. 그런 점에서 기업은 조직 이론의 test field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금전적인 거래 차원에서만 보면 고개를 갸우할 수 있지만, 기업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훨씬 쉽게 와닿습니다. 예컨대, 기업이건 NGO이건, 공무원 조직이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사무실 안에 있는 사람들의 태도 하나만으로도 그 조직의 90% 이상의 정보가 노출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고개도 들고 있지 않는다면, 전혀 고객에겐 관심이 없는 조직일 것이구요. 쭈삣쭈삣 한 두 명이 아는 체를 한다면, 인사를 잘 하라는 조직의 명령은 있지만 일선에서는 그러려니 하는 조직일 것입니다(전혀 조직의 cohererence가 없는 것이겠죠-형식적 역할분담과 지시가 있을 뿐이죠). 방문객을 인지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 눈인사라도 한다면, 그 조직은 구성원들이 그 조직을 ‘나의 것’ 또는 ‘우리 것’으로 여기는 거겠죠. 조직(기업을 포함)이라는 게 워낙 신비스럽게 여겨져서 조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되게 많은 시간을 들여서 관찰해야 한다고 믿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10% 정도일 거에요. 조직원이 사무실 현장에서 상호간에 그리고 고객에게 대하는 태도, 조직이 조직의 기관지, 광고 등을 통해 외부에 노출하는 정보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정보를 노출하는 것입니다. 광고만 하더라도 기업에 유리하게만 전달하도록 되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많은 정보를 불가피하게 노출합니다. 삼성전자 같은 경우, 예전에 “1등”이라는 주제의 광고를 할 때만해도 나름대로 색깔이 있고 자신감이 있었는데, 요새는 전혀 광고의 색깔이 없죠. 정부의 홍보광고 같기도 하구요. 그만큼 사실은 자신감이 없고, 관료화되어 있고, 또한 뭘 해야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LG전자도 마찬가지. 명화를 배경으로한 광고를 할 때만해도 메시지가 명확했는데, 요즈음은 전혀 메시지가 있는 광고를 못하죠. 그만큼 스스로도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한국의 산업을 이끌어 왔던 전기전자 업종의 대표적인 두 기업이 전혀 명백하고 자신감 있는 메시지를 내놓지 못하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한국의 전기전자 산업이 그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산업(업종)과 관련해서는 밑에 다시 서술.
이제 왜 문화인가를 설명해야죠. 거시적으로도 문화 또는 인문의 시대죠. 20세기는 경제의 시대(케인지언의 거시경제가 그 정점이었죠)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는 문화의 시대죠. 이것은 또한 컨텐츠의 시대이기도 하죠.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물건들이 엄청나게 대단하게 여겨졌던 20세기(그래서 미시경제학의 생산함수가 사고를 지배했죠)에서 이제, 물건과 무관하게 “재밌는 것”, “감동적인 것”, “주관적인 것” 이런 표현들이 대세가 된 시대가 되었죠. 모더니즘적 합리성을 상징하는 생산함수가 더 이상 맥을 못 추죠.
그런데, 미시적으로도 역시 문화입니다. 20세기는 경영학의 합리적 관점이 지배했죠. 그래서 기업 컨설팅이 일대 붐을 일으켰구요. 합리적 해법이 존재한다는 믿음이 자리했죠. 그러다가 어느틈엔가 그러한 합리주의적 컨설팅이 뒤켠으로 밀립니다. 기껏 돈들여서 컨설팅 받아봐야, 시행도 안될 뿐만 아니라 별로 성과도 안난다는 평이 일반화된 거죠. “기업문화 오디세이”도 이 점에 그 각을 세우고 있습니다. 좋은 예로 프랑스의 산림 관련 국영기업 ONF를 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컨설팅을 많이 받고 합리주의 경영학으로 무장된 경영진이 들어서도 나아지는 것 없다는 것이에요. 박상원은 그러한 경영학적 접근이 “의식”으로만 관심을 두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기업이 집단으로서 갖는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박상원은 자신을 기업에 대한 정신분석학자라고 위치짓습니다. 무의식은 다양하게 상징화되고 이것이 곧 미시적인 조직에서의 문화라는 것입니다. 표준적 경영학의 컨설팅 기법이 못 짚어 내는 것(표면에 들어나는 것만 보기 때문에)을 정신분석학적 또는 문화적 접근은 짚어낼 수 있다는 거에요. 예를 들면, 조직 구성원을 면담하면서 “지루하다”와 같은 언어 상징이 자주 관찰된다고 할 때, 표준적 경영학은 “조직을 보다 타이트하게 만들자”라는 처방을 내겠지만, 정신분석학적 접근은 다를 수 있다는 거에요. 신상원이 명확하게 짚고 있지는 않아서 제가 나름대로 신상원을 이해했다고 하고 상상력을 발휘한다면, “소명의식”이 결여되 있는 조직이라는 진단을 내릴 수 있다는 거죠. vocation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 신학적인 단어죠(신의 부름이니까요). 그렇다면 이 조직은 신화가 없다는 것이고, 그 처방은 조직의 신화를 구성해내야 하는 것으로 처방할 수 있다는 거겠죠. 바로 이러한 맥락은 아니지만, 신상원이 아모레-태평양(이 기업이 엄청 잘 나가죠. 일본 기업에 이어 서양에 미라는 문화상품을 파는 아시아의 기업이 등장한 것이죠)에 근무하면서 작업했던 기업의 신화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창조신화, 위기의 상황, 재창조 등의 일련의 신화적 방식으로 기업사를 구성하고, 조직원들에게 천사라는 매개자 역할을 부여하는 것이죠. 신(미의 창조자)과 인간(미의 소비자)을 매개하는 천사라는 역할을 부여함으로 인해서 조직원들은 엄청 마음이 설레게 되는 것이어요. 지루하고 비루한 일상이 아니라 신화의 메신저가 되는 것이니까요. 이런 게 미시적으로 문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죠. 모든 조직들은 그 신화를 가지고 있죠(없다면 오래 못가죠).
기업 문화에 접근하는 시각도 다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양한 유형화가 이루어지고 기업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지 진단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신상원은 이러한 기업 문화에 접근하는 시각에 있어서 문화인류학, 정신분석학, 신화학 적인 경향이 강하죠. 나름 장단점이 있겠지만, 신상원의 접근이 저는 꽤 매력적입니다. 왜냐면, 기업문화라는 것도 표면에 들어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고 보이거든요. 신상원의 컨설팅 기법도 그래서 신선합니다. 마치 미술치료사의 간단한 지시사항 정도에요. 꼼꼼하게 정형화된 질문보다는 “당신 회사의 얘기를 들려주세요”, “그 얘기는 어떻게 아시게 된 건가요?”(p. 94)와 같이 무심한 듯한 질문들이 던져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은 회사에 신화가 존재하는지, 그 신화가 어떻게 계승되는지에 대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는 거에요. 이러한 평이한 듯한 질문에 대한 답들을 레비스트로스가 신화분석에 채용한 분석기법들을 적용하면서 기업의 신화(또는 그것 자체가 부제하다는 것)를 이해하는 것이죠. 신상원은 기업의 신화분석에는 레비 스트로스, 그리고 기업의 사회적 구조의 분석에는 조르주 뒤메질에 기댄다고 하고 있습니다(뒤메질은 정말 처음 들어봅니다). 이 두 가지 주제가 오디세이 2권의 내용입니다. 다음에 내겠다고 하는 오디세이 3권은 처방(기업전략)에 대한 것입니다.
왜 신화가 중요한가도 짚어야죠. 우리는 신화가 옛날 얘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신화가 있기 때문에 신화에 무관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입양된 아이들은 성인이 되면 꼭 부모를 찾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꼭 친부모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는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도저히 형편이 키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이더라구요. 지금 먹고 사는 게 나쁘지 않더라도 존재의 근원(그게 신화)이 불투명하면 평생을 정체성 혼란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대게 어릴 때 야단 맞으면서 듣는 얘기 중에 “어이고, 도저히 말을 안 들어서 안되겠다. 원래 주어 왔던 다리 밑에 데려다 줘야겠다”라는 게 굉장히 위협적이죠. 어린이에게 있어서 이것은 상당히 공포스럽죠. 부모라는 존재의 근원이 갑자기 사라지고 다리 밑이라는 이해 불가능한 공간 만이 다가오거든요. 성장하면서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게 꼭 대단한 교육서비스가 아니라, “아이고 내 새끼”, “아이고 내 강아지”라고 하면서 그 존재의 근원을 환기시켜주는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 짤막한 표현처럼 아이들에게 정서적 위안을 주는 것은 없어 보입니다.
신상원은 신화(mythos)와 과학(logos)를 대비시켜서 신화의 필요성을 역으로 그 합리성을 잘 보여줍니다(p.33부터 한참). 신화는 왜에 대한 역시 합리적인 답변이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묻는 왜에 대한 꼬리를 잇는 질문들에 대해 우리가 통상적으로 여기는 과학적인 설명보다는 신화적인 설명이 훨씬 더 쉽고 아이가 잘 이해합니다(아이는 왜 태어나냐는 질문에 하느님이 바구니에 싸서 가져다주었다와 같은). 성인이라고 해봐야 뇌 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아닌 만큼 이런 신화에 대해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에요. 더 일반적으로는 현생인류인 호모사피엔스의 뇌구조가 근본적으로 바뀐 게 없다는 것이기도 해요. 그래서 호모 사피엔스의 원초적 세계관이 지금도 유효하다는 거에요. 과학이 신화를 대체한 것은(정확하게는 대체한 듯이 보이는 것은) 불과 2-300년 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구요(Gilbert Durand). 세계에 대한 2분법, 3분법 (경우에 따라서는 5분법) 과 같은 것이 그 예죠. 2분법적 분석은 레비 스트로스가 자주 활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3분법도 있죠(삼위 일체, 행운의 숫자). 신상원은 인도/유럽(신화는 언어로 드러난다는 점에서 인도/유럽 어족)의 사회는 생산자/학자—생산자—전사 이렇게 3분되어 있어서 이게 균형을 이루고 있어야 한다고 봤다는 거에요. 파리스가 3명의 여신 중에서 누군가를 선택해야 하고 그래서 그 균형을 깨뜨렸기 때문에 결국 트로이 전쟁이라는 재앙이 비롯한 거라는 거에요. 동양사회는 2분법(음/양)도 중요하지만, 5분법(오행)도 중요하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고구려의 삼족오는 3분법을 보여주죠), 사실은 2분법, 3분법, 5분법이 모두 호모사피엔스의 뇌의 작동방식인 거죠. 그래서 결국 이 분법들이 모여서 60진법을 구성한 것이죠. 분법이 커지면 뇌가 잘 못 따라가죠. 5분법만 해도 정5각혁을 그리는 것은 얼추 할 수 있지만 선분을 5개로 나누는 것은 쉽지 않죠(원시 종족이 3보다 큰 수는 셀 수 없다고 해서 웃을 일이 아닙니다. 어떤 지적 외계 생명체는 7분법도 아주 자연스럽게 행할 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2와 5를 취해서 10진법을 쓰고 있는데 이게 썩 좋은 진법이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으로 나누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너무나도 많이 필요한데, 10진법을 쓰다 보니까, 3.3333… 과 같은 아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숫자들이 나오는 것이죠. 2, 3, 5로 이루어진 30진법(60은 이 계통이죠)이 나름 적절한 진법이라고 봅니다. 좀 작은 단위를 쓰기 위한다면, 12진법정도가 좋구요(30진법을 쓰게 되면, 1에서 29까지 고유 기호가 배정되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죠. 이 경우 손가락이 못 따라 가죠).
신상원의 신화적 설명의 중요성을 저는 프랙탈 기학으로도 비유를 들 수 있다고 봅니다. 눈의 결정은 결국 6각형 형태소가 주변의 여건과 결합하여 자기 증식하는 것이거든요. 구체적인 모습은 모두 다 다르지만, 6각형이라는 형태소는 남죠. 이게 신화라는 것이죠. 요 것을 하나 이해하고 있으면 그 다양한 눈의 결정에 대해 혼란스럽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꼭 이해해야만 하는 원칙 하나만 알고, 나머지 사항(현실에서의 다양한 6각형 눈의 결정)은 우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면 됩니다. 필연적인 것과 우연적인 것 사이의 분화가 깨끗하게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게 현대 수학의 혼돈이론(chaos theory)의 메시지죠. 저는 인간의 지적인 활동도 프랙탈 기하학에서 못 벗어난다고 봅니다. 자연은 결국, 간단한 필연성(형태소)를 우연과 결합시키면서 다양한 사물들을 만들 수밖에 없을 것이거든요. 생명체가 계통발생을 되풀이하는 것(예컨대 인간의 태아도 한 때는 물고기 같은 모습도 거치죠)도 그 맥락이겠죠. 그래서 인간 자체가 프랙탈 기하학이죠. 뇌신경계와 혈관계가 그 대표적인 예죠(이 기하학적 구조를 프랙탈 기하학이 다룹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사고가 프랙탈 기하학에서 자유롭겠냐는 것이죠.
신화는 국가, 민족에서 두드러지죠. 신상원도 짚고 있지만, 한국의 우파는 8.15가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사실 이게 어느 날짠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죠)을 한국의 기원으로 보고 싶어하죠. 이것은 우파가 거기서 신화를 쓰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서 우파의 존재가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8.15가 갖는 민족 해방의 상징이 싫기 때문이기도 하죠.
신상원이 오디세이 2에서 신화적 설명의 시사점으로 짚고 싶은 게 2가지죠. 신화자체의 분석과 기업의 사회적 구조(세부 조직구성)를 진단하는 것이죠. 신화자체의 분석에서 시사점들 중에서 강조하고 싶은 바는 조직이 스스로에 비유하는 존재의 이유(즉 소명)과 그 토템적 발상입니다. 프랑스의 산림기업 ONF에 대한 합리주의적 경영학적 접근이 안되는 이유에 대해 신상원은 ONF는 비록 기업의 공식 설립은 1966년이지만, 그 소명(또는 신화)의 시작은 13세기 필립4세 때부터라는 것입니다(p. 30부터 쭉). 필립4세가 자신의 신성의 상징을 숲에 두었고, 이 숲을 관리하는 기사단을 두었다는 거에요(지금도 파리 가면 대도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숲이 있다는데 놀라죠). 그래서 지금도 ONF는 자기의 소명을 숲을 지키는데 두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경영합리화니 숲의 자원화(관광이건, 목재건)에 대한 경제적 발상 자체를 거부한다는 거에요. ONF는 여전히 자신의 토템(은유)가 “숲의 천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신상원이 오디세이 2에서 ONF에 대한 처방까지 제시하고 있지는 않은데(아마도 3권을 기대), 제가 추측한다면, 그 신화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겠죠. 숲을 자원화하는 것 역시 또다른 신의 소명으로 여기게 할 수 있는 그런 신화를 접목시키는 것 말이죠(토템에 대한 강조는 밑에).
기업의 조직 구성에 대한 시사점에 있어서는, 역시 아무 조직구성이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3분법이 형태소인 사회에서는 그러한 균형을 가져오는 조직 구성을 해야 받아들여진다는 것이죠. 이에 대해 재밌는 부연들이 많이 있는데, 생략합니다.
앞에서 미루어두었던 토템적 비유를 업종선택(또는 먹고살거리의 선택)의 문제에 제 나름대로 적용해보겠습니다. 현대의 제조업의 분화가 이루어진 게 그리 오래되지는 않습니다. 산업혁명과 더불었던 것이죠. 옛날에는 기본적으로 다 바이오 산업이었습니다. 농업, 어업, 축산, 임업 이 다 기본적으로 바이오산업이죠. 현대의 바이오 산업도 기실 이것에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먼저 화학산업이 분화했죠. 그래서 예전에는 바이오산업의 영역이었던 염료, 직물 등을 화학산업이 대체하게 되죠. 제약도 같은 맥락입니다. 옛날에는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천연 약물이었죠. 그런데 일부 화학적 성분만 취해도 약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죠. 그래서 그 화합물만 만들면 되었던 것이죠. 그러다가 20세기에 전기전자산업이 태동하죠. 전기전자산업은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전자라는 것은 너무나도 제어가 쉬었고, 그래서 제어기제로서 그리고 에너지로서 모두 훌륭했습니다. 진공관에서 트랜지스터로의 전환이 전자에 대한 제어수준에 있어서 엄청 정밀화를 가져왔지만(진공관은 한 가지 신호를 발생하기 위해서 너무나도 많은 전자들을 어쩔 수 없이 썼습니다. 그래서 ENIAC 컴에서는 진공관들로 가득찬 방이 있어야 겠고, 그 방의 온도는 엄청났죠-설령 냉각을 하더라도), 저는 기본적으로는 에디슨이 열어놓은 전기의 시대가 여전히 큰 패러다임이라고 봅니다(그가 만든 GE는 여전히 20세기를 대표하는 기업이구요). 엄청 뒤켠으로 밀렸다고 생각했던 바이오가 그러나 20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부상하죠. 이것은 DNA가 발견되고 부터인데, 이전에는 바이오는 제어하기 너무 어려운 신비스로운 존재였습니다.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었죠. 그러다가 DNA가 발견되면서부터 제어 가능한 대상이 됬죠. 이러면서 새롭게 바이오가 산업화되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역시 바이오는 원래의 바이오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제어를 해도 원하는 대로 안되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자, 화학, 바이오 산업을 그 제어대상으로 보면, 전자(electron), 저분자화합물(small molecular compound), 고분자화합물(large molecular compound)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각각을 각 산업의 토템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대상에 초점을 두는 산업이나 사람들을 각각 전자토템족, 저분자토템족, 고분자토템족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는 것이에요. 제약과 바이오쪽에서는 정말 약칭해서 각각을 small molecule 그리고 large molecule이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구분한다고 할 때 다만, 부르는 명칭만이 차이가 있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거에요. 각 분야별로 정말로 사람들의 성격 그 집합으로서 문화가 다릅니다. 전자는 굉장히 제어가 잘 되고 예측가능하죠. 그래서 이쪽 분야 사람들은 엄청나게 확실성에 대한 신념이 높습니다. 원했던 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 수행과정 상의 실수를 의심합니다. Small molecule는 그 예측성이 약하죠. 어느 정도 기대치가 있기는 하지만, 정말 원하는 분자 화합물이 만들어질지는 해봐야 압니다. 상당히 끈기 있게 잘 안되었던 것들을 각오하고 다양한 시도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손 많이 타고, 기계나 시료도 변수고, 심지어는 장소도 변수입니다. 그래서 이쪽 분야 사람들은 무지하게 근성을 중시합니다. 어쨌든 벤치에 버티는 시간이 많아야 한다고 보구요. 그리고 숙련의존도도 높습니다. 화학 실험실은 그래서 도제적 측면이 엄청 강합니다. 고분자 화합물은 DNA가 있기 전까지는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잘 안되었죠. 기껏해야 우생학 정도였습니다. 이쪽은 원하는 바라는 것 자체를 기대하지를 않습니다. 다만, 끈질기게 관찰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얼추 단서를 찾는 정도죠. 그런데 그 단서도 워낙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들이 작용하기 쉽기 때문에 딱히 원인이라고 하기도 어렵죠. 이 분야는 그래서 엄청 경험적이죠. 멘델이 유전 법칙을 발견할 때 했던 그런 지루한 작업과정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입니다. 통제가 어렵기 때문에 이쪽 분야 사람들은 아예 liberal한 면이 있어 보입니다. 어차피 관찰에 의한 통찰에 많이 의존하니까요.
한국을 대표하는 산업이 단연 전기전자 산업이죠. 가장 많은 특허가 축적되어 있구요. 60년대에 한국의 미래 먹고살거리를 기획할 때, 미래는 전기전자산업이 이끌 것이다라는 미래 예측이 있었고, 그래서 전기전자산업을 밀어붙이자고 했죠. 당시에 트랜지스터도 미국에서도 아직은 실험실 수준에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놀라는 발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그런데, 미래예측도 있었지만, 운도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적으로 전기전자 산업이 호흡이 짧습니다. 그래서 열심히만 하면 단기간에도 추격가능한 면이 있었다고 할 수 있죠. 우리가 화학도 하기는 했지만, 제약처럼 저분자 화합물을 만드는 게 아니고 원칙적으로 증류만 하면 되는 석유화학만 했죠. 원하는 저분자 화합물을 만든다는 것(그리고 그보다 이전에 원하는 게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은 호흡이 길죠. 많은 시행착오를 해도 제대로 된다는 보장이 없죠. 그래서 화학산업은 석유화학을 제외하면 제약을 포함해서 전반적으로 한국이 뒤쳐지죠. 최근에 많이 쫓아왔지만, 주요 소재는 수입하니까요. LCD 의 액정을 독일과 일본(독일은 Merck, 일본은 잊었네요)에 수입하는 게 그 대표적인 예죠. 화학과는 대조적으로 저는 바이오는 출발시점이 그렇게 큰 차이는 아니죠. 그리고 워낙 통합적인 사고를 요구해서 오히려 동양에 더 맞는 산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예를 들면, 현대의학이 있기 전까지는 동양이 의술에서 앞섰죠. 동의보감이라는 엄청난 의학서를 내놓은 경험이 있구요. 최근에 이공계의 성과 중에 바이오 분야가 상당히 두드러집니다. 소위 impact가 높은 저널에도 보면 한국의 바이오 관련 연구들이 실리구요. 이처럼 통합적 사고를 요하는 분야인 바이오가 동양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 맞지 않냐는 생각이 듭니다.
신상원은 mythos와 logos를 통합과 분석의 관점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피카소의 입체적 추상화들이 통합적이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 분석적이라는 것이에요. 약간 이상할 수 있지만, 피카소의 그림들을 보면 어쨌든 여러 파편들이 모두 한 그림에 뭉개져 있습니다. 각각이 딱히 정합성이 있지는 않지만(서로 모순되기도 하지만), 이렇게 한 그림(또는 사고체계)내에 뭉개놓은 것을 통합적 그리고 신화적인 것이라고 보죠. 반면에 다빈치의 그림은 원근법이라는 원칙하에 정확하게 각 부분들이 놓여야 할 자리에 배치되어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분석적이라는 것입니다.
최근 들어서 애플이라는 괴물이 산업에 일대 지각 변동을 일으키죠. 애플을 ‘정보통신’기업으로 부르는 게 어색하죠. 애플 이후에는 사실 정보통신이라는 단어 자체도 되게 어색합니다. 정보를 교류한다기 보다는 컨텐츠를 즐기고 만들고 있으니까요. 정보와 통신은 그저 그 기반에 불과해지구요. 그래서 저는 애플을 기존 산업의 맥락에서 해석하게 되면 큰 오해를 낳게 된다고 봅니다. 얼핏 삼성 갤럭시와 애플의 아이폰이 경쟁하니까 같은 산업에 있는 듯이 보이지만, 현상만 그렇다는 거에요. 삼성은 전자 토템족이지만, 애플은 전혀 새로운 토템족일 거라는 생각이 드는 거에요. 그 토템을 ‘네트워크-인터페이스’라고 복잡하게 이름 붙여주고 싶습니다. 애플은 네트워크 기업(전통적인 통신회사)도 아니고, 단지 단말기에서 사용자의 편의성을 추구하는 인터페이스 혁신의 기업도 아니죠. 네트워크-인터페이스가 통합된 새로운 괴물이라는 거에요. 낯선 토템이죠. 마치, 중세 유럽의 국가들에게 징기스칸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런 분석을 하게 되면, 결론은 애플과 정면 대결하면 안된다는 것이죠. 징기스칸과 정면대결했던 나라들은 파멸을 했죠. 아예 그 지배를 받아들이면 관대해서, 종교도 강요하지 않았죠. 그냥 최소한의 의무사항만 이행하면 되었죠. 애플을 소프트웨어가 강한 기업이라고 보는 것은 전혀 잘 못된 것입니다. 애플은 네트워크와 인터페이스 전반에 대한 통찰이 뛰어난 기업입니다. 애플이 구현한 것을 소프트웨어로만 보자면, 쉽지 않더라도 코딩할 수 있는 것입니다. 네트워크-인터페이스 그 전반에 대한 비전을 도저히 쫓아가기 어려운 것이죠. 징기스칸도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유형의 제국이라는 국가 네트워크를 구현한 것이죠.
아까 전자 토템족과 바이오토템족이 다르다는 것도 기업의 업종(먹고살거리)를 정할 때 시사점을 줍니다. 예를 들면, 삼성은 전자 토템족이죠(원래는 초보적인 수준의 화학에서 출발했지만 전지전자가 오늘의 삼성을 일으켰죠. 그래도 신화의 원형 때문에 제일모직, 제일제당-CJ는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고 봐야죠). 그런데 최근에 바이오 쪽에 눈을 돌리고 있죠. 제 생각은 쉽지 않을 거라는 것입니다. 바이오 쪽 분야의 liberal함은 삼성에게 생소하거든요. 바이오분야는 기업과 연구실이 외관상 구분이 안됩니다. 기업 내부 사진을 찍어 놓고, 기업인지 대학 실험실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는 거죠. 만일에 삼성이 바이오를 한다면(저는 한국사람과 바이오가 친화성이 높다고 봅니다), 새롭게 내부적으로 키우기보다는(그것은 기존의 조직과 갈등을 야기합니다), 아예 왠만큼 자리한 기존의 기업을 사들이는 게 낫다는 것이죠. 그래서 전혀 새로운 토템의 이식을 하는 거죠. 마치 곰부족의 주도하에 호랑이부족과의 결합을 시사하는 단군신화 같은 것 말이죠.
이렇게 신화적인 분석을 하고 나면 자칫 결정론적인 것의 느낌도 풍깁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봐요. 서양 사람들이 분석적인 학문도 발전시켰지만, 통합적인 학문과 기술도 강합니다. 최근 들어서 융합학문이나 융합산업이라는 것도 서양이 주도하고 있구요. 바이오 산업이라는 것도 천연약만 해도, 분석적 표준화를 통해서, 동양 사회의 주먹구구식의 천연약과는 새로운 차원의 천연약을 내놓습니다. 동의보감이 탁월한 의서이기는 하지만, 인삼이 좋다고만 하지, 인삼이 어떤 조건을 갖춰야만 하는지는 표준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지 못하지만, 서양에서는 하고 있다는 것이죠. 애플이 주도하는 통합화라는 것도 서양은 분석적이라는 통념과 배치하죠. 스티브 잡스가 한 때 굉장히 동양적인 것에 심취했다고 하죠(서예에 반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통합적 사고가 강하게 베인 네트워크-인터페이스라는 새로운 산업을 연 것이죠. 그 자신 서양인으로서는 특이하게 기술(기술이 갖는 서양의 상징성이 있죠)과 더불어 인문을 강조하구요. 이처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좋은 것이라고 해서 갑자기 이식되지 않는다는 거에요. 신상원이 하는 것처럼 상당한 상징조작(신화의 재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신상원은 오히려 결정론보다는 도구론적인 경향이 강하죠. 그래서 신상원이 기업 컨설턴트로서의 실용성을 갖는 것이구요.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CEO직을 사임했죠. 그래서 애플이 이전처럼 혁신적일 수는 없지 않겠냐는 추측을 많이 합니다. 저는 조심스럽지만 신화적 시각에서 그에 반대해봅니다. 잡스는 이미 신이 되어버렸다고 봅니다. “기술과 인문의 결합”이라는 소명을 스스로 내리고 그리고 보여주고 사라지는 거죠. 마치 예수와 같다고 할까요. 잡스의 소명은 너무나도 시대를 관통하는 바라서, 쉽게 폐기될 게 아닙니다. 그리고 그러한 소명을 옆에서 지켜보고 실행해온 사람들이 있죠. 마치 예수의 제자들 같은. 한국도 비슷한 기업이 있죠. 안철수의 안랩이 그렇습니다. 안철수는 자신이 떠나도 무방한 그러한 기업을 만들고 싶다고 했죠. 기업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의 문화DNA를 만드는 것이죠. 적어도 아직까지는 안랩은 마치 안철수가 기업의 CEO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애플도 그렇지 않을런지요. 단, 후계자들 사이에 분열이 있지는 않아야겠죠.
기업문화 오디세이 링크:
구글과 애플의 기업문화를 비교한 재밌는 글: “Apple vs. Google: How the battle between Silicon Valley's superstars will shape the future of mobile computing”
http://www.businessweek.com/magazine/content/10_04/b4164028483414.htm
--- 특히 재밌는 대목, 양기업을 대조한 표에서, 구글의 직원들은 20%의 시간을 자기를위해서 쓰고 애플의 직원들은 120%의 시간을 잡스를 위해 쓴다는 대목.
--------- 제가 2년 전에 기업문화 오디세이 1을 읽고 간단히 쓴 리뷰(2009.7.20)
오늘은 아침 메일로 더는 안 나서려고 했는데, 지난 번에 말씀드린 바 있는 "기업문화 오디세이"(신상원)란 책을 읽게 되어서 몇 자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신상원이란 분은 현재 아모레퍼시픽에 근무하고 있고 직업이 학자는 아니라서 잘 안알려진 것 같은데, 36세이고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네요. 어휴, 저보다 훨씬 나이가 적습니다만, 존경심이 생겨납이다. 정말 머리를 시원하게 해주는, 정신이 번쩍 들게하는 창의성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의 아이디어가 어디까지나 이 분의 독창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기왕의 경영학 교과서에서 다루는 식의 기업문화와는 질이 다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기업을 정신분석학적 대상으로 삼고, 기업문화를 무의식으로 간주합니다. 그래서 이 분은 기업문화를 파악하는 것을 정신분석으로 간주하고 있네요. (이런 접근방식은 그만의 방식은 아닌 듯합니다. 본문에서 유사한 접근을 하는 사람들이 소개됩니다.) 이러한 시각자체가 기존의 경영학 전공자들이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 저 자신 역시 항상 정신분석학에 많은 미련을 두고 있는 편이어서 그에서 뭔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이 양반 덕택에 저의 우둔함을 자각하고야 말았습니다. 벌써 이렇게까지 구체적인 논의를 발전시켰구나하면서 감탄해 마지 않았습니다.
이 분이 참 뛰어난 점은, 정신분석학과 같은 흔히들 얘기하는 돈 안되는 학문을, 돈이 되는 것으로 발전 (즉, 실천)했다는데도 있습니다. 이 분은 아모레 퍼시픽의 기업문화는 제국주의유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90년대에 문어발 확장을 했던 것이 중대한 실책이었다고 진단하고 있구요 (아래 도식 참조) 강한 응집력을 요구하는 정복자형공동체의 문화를 갖는 "아리따움"이라는 하위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더라구요. 이 독특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버젓이 한국의 대기업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도록 한 데에는 아모레퍼시픽의 서경배 사장이 큰 도움을 주었더라구요. 서경배 사장은 EBS의 CEO 특강에도 출연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책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분의 이론이 다음과 같이 8개의 기업문화 유형으로 도식화됩니다.
강한 응집력 |
|
약한 응집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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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적 경영 |
체계적경영 |
|
|
경험적 경영 |
체계적경영 |
교류정도 강 |
정복자형 |
기업가형 |
|
교류정도 강 |
제국주의 갱 |
제국주의 시스템 |
교류정도 약 |
자급자족형 공동체 |
학자형 |
|
교류정도 약 |
사회적 분열 |
전체주의 회사 |
저자는 아모레는 "아름다움"이라는 모토가 있는만큼, 그 모토를 중심으로 기업내부와 고객과의 관계가 상당히 응집력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문어발로 특징지워지는 제국주의시스템은 맞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기업 전체는 기업가형으로 위치짓데, 세부 브랜드는 강한 내부결속을 다지는 정복자형공동체로 위치지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복자형공동체는 고객과는 활발한 소통을 하고 경영에 있어서는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그래서 경험적인) 유형입니다. 저자는 애플을 이 유형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삼성과 LG를 모두 제국주의 시스템 유형으로 위치짓고 있습니다. 저도 그러한 점에서는 동의합니다만, 삼성이 제국주의 시스템 유형으로 자리잡게 하는데 있어서 큰 장애물 (꿀린다 또는 구린 게 너무 많다는 거에요)이 있습니다. 제국주의시스템이 되기 위해서는, 저자도 강조하듯이, 무척이나 개방적이어야 하고 새로운 사업을 끌고가기 위해서 그 사업을 잘 아는 사람들(용병)을 적극적으로 수입하는 실용주의가 있어야 합니다. 저자는, 삼성이 90년대 신경영을 선포하면서 보수적인 학자형기업 (내부적으로 결속하고 외부대응에는 소극적)으로 귀착될 가능성을 불식시키고 제국주의 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보는 군요. 저는 저자의 개념을 빌려서 말한다면, 삼성이 후계 구도에 발목을 잡히면서 제국주의시스템의 필수 불가결한 조건인 개방성/실용성을 결여하고 외부로부터 문을 닫는 학자형이나 전체주의 회사로 후퇴해버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큰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구요 (과거 삼성자동차의 실패처럼).
기업문화는 일반적으로도 중요하지만, 특히 한국사회에서 제가 주목하는 바는, 한국기업들이 대게 개발독재의 산물이라서 여전히 문화적으로 내부응집력을 무지하게 중시하는 과거의 관성에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삼성 신입사원의 마스게임연습 동영상 보셨나요?) 그런데 경영은 더더욱 글로벌해지고 있고, 무역비중은 엄청난 한국의 기업들이 그렇게 성장시대의 응집력 유형만으로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물론 응집력을 강조하는 기업도 여전히 중요하겠지만, 그런 기업들에만 치우쳐져 있는 현재의 상황은 부적합한 것입니다. 더더욱, 소비자와의 관계에서는 그 교류가 더 긴밀해지지 않을 수 없겠죠. 극심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면에서 대체적으로는 위쪽 라인(교류정도 강)의 기업들이 많아지고 응집력약한 기업과 응집력강한 기업들이 균형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에 대한 이러한 분석은 반드시 기업에만 국한될 필요가 없습니다. 저자는 공기업과 공무원 조직을 전형적인 학자형기업으로 보더군요. 한국사회에서 제가 주목하는 고리로 저는 조직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왜 한국인은 그 개인적인 잠재력이 뛰어난데, 집단으로서는 그 장점을 살려내지 못하고 오히려 미련해질까라는 소박한 질문을 늘 하고 있거든요. 그 고리를 저는 한국사회의 미시적인 조직(micro organization)에 보고 있습니다. 미시조직이 개인의 생기발랄한 창의성을 억압하고, 그 개인들이 오히려 멍청하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수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국의 기업이건 공공부문이건, 하는 일의 50%는 안해도 그만이거나 오히려 안하는게 좋은 일을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 왜 미시적조직은 그렇게 멍청한가? 미시적인 조직의 최상층인 권력이 문제인가?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권력이 미시적인 조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뛰어난 수준의 통제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우파건 좌파건). 저는 미시조직이 멍청한 상태로 lock-in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시조직내에서 창의성이 있는 사람은 튀는 사람으로 찍히고, 무난한 사람은 버젓이 살아갑니다. 미시조직의 리더는 그저 무난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되구요. 한국사회의 미시조직의 리더는 대부분 무난한 사람들이지 뛰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식의 양이나 창의성이 오히려 삼각형 구조이죠. 리더가 컨텐츠가 부재하니까 자꾸 구성원에 의존하고, 고무도장이 되죠. 그러면 뛰어난 컨텐츠를 이해하는가하면 그렇지도 않죠. 리더의 지식양과 통찰이 부족하니까, 새로운 컨텐츠를 말해줘도 이해를 못하죠. 이러다가 어쩌다가 뛰어난 사람이 리더가 되었다고 치자구요....정말 구성원들의 타성과 게으름(일하는 시간이 적다는 것은 아닙니다)에 절망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관성이라는 게 있으니까요). 구성원들의 마인드셋을 바꾸고 재교육하는데 엄청난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히딩크가 엄청나게 많은 대표팀의 소집시간을 요구했죠. 그 소집시간이 없었다면 한국이 잘하기는 어려웠겠죠).... 그러다보면 짧은 시간에 성과를 보여주기는 어려우니까, 무능한 리더로 평가받기 쉽죠 (히딩크간 성공한 감독으로 기억되지만, 사실은 코엘류 감독같은 경우도 굉장히 뛰어난 감독이지만, 한국에서는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혔죠). 이렇게 해서 그 리더는 의욕은 있고 사람은 좋지만 무능한 리더로 낙인찍힙니다. 차라리 과거형의 리더가 낫다는 소리가 나오죠.
아주 강하게 확장하면 한국사회에서의 대톨령도 그러한 위치에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