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6.27)
대 우르구아이 시합을 앞두고 허정무감독이 "1골 넣면 2골 넣겠다"는 시원스러운 각오를 밝혔었는데, 경기 내용도 그만큼 박진감 있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과가 어찌될지 모르는 시합을 했다면 대단히 잘한 경기입니다. 피차에 이길 수도 있고 질 수도 있지만, 관전자에게는 그러한 긴장감 넘치는 경기는 선수들이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죠.
'8강도전' 허정무, "1골 내주면 2골 넣어 꼭 8강 오르겠다"
이번 시합이 좋았던 것은, 한국 축구의 강점을 잘 드러내주었기 때문입니다. 대 그리스 전보다도 훨씬 더 한국축구의 색깔이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어야할지에 대해서도 잘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축구는 한 마디로 "fight"입니다. 정교하지도 않고, 잘 조직되어 있지 않지만, 시종 상대를 몰아붙이는 정신력과 역량이 한국축구라는 거죠. 뒤지고 있더라도 결코 질 것 같지 않은 위협감을 주는 그런 축구입니다. 얼핏 실속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게 축구의 원시적 아름다움입니다. 백기완 선생이 이쁘게 축구하는 메시보다는 상대를 우지끈 부러뜨릴 것 같은 루니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격렬하고 투박하고 원시적인 것이 축구의 아름다움입니다. 이번 대우르구아이전에서 한국 축구가 그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의 월드컵] 백기완 "축구는 예술이고 철학이야"
미학적으로 훌륭하면 된 것인가? 물론 이겨야죠. 이번 월드컵이 아주 좋았던 것은 이기기 위해 한국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드디어 한국이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도 드러난 거죠. 부족한 것을 파악하는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잘 해야 합니다. 지면 바로 탈락하는 칼같은 긴장김이 있는 월드컵16강 전 정도는 되어야 부족한 게 드러납니다. 이번 월드컵 16강 전에 진출할 수 있는 정도로 잘 했기 때문에 부족한 것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거죠. 흔히, 평가전에서 강자랑 만날 기회가 있으면 배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단칼 승부의 긴장감이 있지 않은 시합에서 얻을 것은 많지 않습니다. 진정 부족한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는 상대방이나 나나 단칼 한 번에 베일 수 있다는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얻어진 결과에서만 비로소 배울 수 있는 것이죠. 이번 16강 전에서 한국은 그만큼 잘 했고 상대방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였습니다. 그래서 진검 승부가 될 수 있었고 진검승부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을 배운 거죠.
한국은 감독의 판단력, 공격의 결정력, 수비의 조직력 모든 면에서 '조금씩' 부족했음이 드러났죠. '조금씩' 부족했음이 드러났기 때문에 앞으로 고쳐야 할 것들이 파악이 된 거죠. 이렇게 좋은 경기가 아니었다면, 도대체 어디가 문제였는지 모르겠다던지, 아니면 문제가 있는지 모르겠다던지 하는 도움이 안되는 결과가 되는 거죠. 대 아르헨티나 경기는 정말 어디서 손을 봐야 할지 모르겠다는 점에서, 그리고 대 그리스 전은 상대가 너무 허술해서 문제가 드러나지를 않았다는 점에서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대 나이지리아 시합은 어쨋든 결과가 좋아서, 그 내용은 다 감춰져 버렸구요.
이렇게 조금씩 부족함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 너무 큰 성과죠. 혹시 히딩크 감독이 했다면 좀 더 좋은 성적을 얻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magic일 뿐이죠. 2002년의 결과를 우리는 흔히 magic이라고 생각하죠. 우리도 딱히 실력이라는 개념을 부여하지는 않죠. 그만큼 사람들의 관념은 정직한 것입니다. 이방의 신비로운 주술사가 와서 마술을 부린 것으로밖에 볼 수 없었고 그래서 그 결과는 여전히 신비스로운 것이었죠. 그래서 주술사 히딩크가 떠난 뒤에도 어설프게 마술을 재현해볼려고 했는데 턱도 없었죠. 과연 한국인 스스로 재현가능한지 자체도 확신이 없었구요. 그래서 2002년의 성공은 큰 기쁨이었지만, 동시에 콤플렉스이기도 했죠. 허정무 감독이 부족한 부분이 있었을지언정 한국이 스스로 내세울 수 있는 최고의 감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 감독이 구현할 수 있는 최고치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제 드디어 차분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그 부족한 부분도 알게 된 것이죠. 외국인 감독을 영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히등크의 마술을 과학적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죠. 그렇게 알고 보면 또 별 것도 아니라는 거에요. 향후 한국인이 감독을 하건, 외국인이 감독을 하건, 이제 감독이 할 수 있고 해야할 것에 대한 개념을 얻게 되었습니다. 누구를 대표팀 감독으로 쓰건 간에 최소한 4년 정도는 맡길 것입니다. 이제 감독에게 마술을 기대하지는 않겠죠. 감독이 설령 부족한 부분이 있을지라도 선수들이 돌파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거죠.
선수들은 골결정력과 수비조직력에서 부족함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 축구를 대하는 자세가 더 진지해질 것입니다. 극도로 팽팽한 긴장 상태에서도 자신감과 여유를 갖는 것이 요체라는 것을 배웠겠죠. 그리고 한국축구가 그 스타일을 유지한다면, 언제든지 상대방을 위협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에 공격과 수비 모두 훨씬 여유가 있겠죠. 나이가 어린 이청용이 보여준 여유는 놀랍거든요. 이게 정신력이죠. 긴박하지만 몸과 마음이 주눅들지 않는 것이죠. 이청용 같은 선수가 모델을 제시했으니까, 다른 선수들은 훨씬 쉽겠죠.
감독과 선수들에게서 부족한 그 2%는 어떻게 가능할까요? 감독과 선수들에게서 비디오를 보면서 가르쳐셔 얻어질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한국축구의 시스템이 해결해야 합니다. 선수들은 매주 전쟁 같은 긴장감이 감도는 경기를 해야 합니다. 이러한 긴장감에서 단련되면 국제대회에 나가서도 충분히 제 기량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슈팅 한 번, 수비 한 번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경험해야만, 그 정확성이 높아집니다. 20여 팀으로 이루어지는 몇 개의 리그가 있고 리그간에 승강제가 있다면, 모든 경기 하나하나가 월드컵의 16강 전 같은 게 되는 거죠. 이런 전쟁같은 리그에서 단련된 박지성, 이청용이 보여주는 일정 수준 이상의 기량이 선수들이 몸담고 있는 리그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죠. 한국은 지금 2%를 메우면 되는데, 그것이 무척이나 많은 시스템적인 투자가 이루어져 합니다. 악기의 음질이 약간 좋아지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엄청나쟎아요. 로그함수 같은 거죠. 엄청 많이 투자해야 약간 좋아지는 거죠. 지금 한국은 로그함수의 상단에 좀 밋밋해보이는 그런 포인트에 와있습니다. 감독과 개별 선수들이 현재의 시스템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다 보여줬어요. 그럼에도 16강이라는 좋은 성적을 올렸구요. 이제 몫은 고스란히 시스템에 남겨진 거죠.
이렇게 대표팀이 아니라 시스템에 책임이 있음을 명료하게 보여준 게 가장 큰 성과입니다. 일각에서는 감독과 선수들에 불만을 표출하겠지만, 대세는 시스템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번 월드컵에서 또는 다른 스포츠의 국제대회에서 과분한 즐거움을 누렸죠. 스포츠인프라에도 별로 투자를 안하고, 스포츠에도 별로 참여 안하고, 중요한 국제대회에서만 온 관심을 집중시켰죠. 굉장히 모험주의적인 태도이죠. 그런 과도한 관심과 실망의 급변동은 스포츠 선수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죠. 일부 대표선수에게 모험주의적인 경합을 강요하는 것은 지나치죠. 탁월한 엘리트 선수의 멋진 모습은 한편으로 즐기고, 다른 한편으로 많은 삶속에서의 스포츠에 몸담아아죠. 아이들이 학교 대표선수에 뽑히면 응원하러 가는 문화가 되야죠. 그래야만 비로소 좋은 경기를 한다는게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어야 하는지 알게 되겠죠. 이기고 지는 것을 넘어서서, 그렇게 스포츠를 매개로 가족과 학교와 지역의 공동체가 한 마음을 가져보는 경험을 일상적으로 해야죠.
저는 한국의 시스템은 놀랍게 성장했다고 봅니다. 이제 critical mass에만 도달하면 됩니다. 축구의 경우도 이제는 유소년 지역리그를 하죠. 학교공부를 못하면 선수로 뛸 수 없게 하구요. 대표팀의 감독도 이제는 단기간의 성적에 연연하지는 않을 거에요. 이러저러한 ups and downs도 과정으로 보겠죠. 대표팀의 선수들의 개별 기량에 대해서도 과도한 칭찬과 비난도 하지 않을 거에요. 좋고 나쁨이라는 것도 확률적 분포로 이해하겠죠. 향후 10년 쯤 지나면 한국의 스포츠 시스템도 놀랍게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엘리트스포츠만 아니라 대중의 스포츠(한편으로는 직접 뛰고 한편으로는 관람하는)로 자리하겠죠.
다음 월드컵에 한국이 어떠한 성적을 거둘지는 모르죠. 16강에 못 갈 수도 있겠죠. 심지어는 본선에 참여하지 못할지도 모르죠. 하지만, 향후 몇번의 월드컵에서 영영 16강이 어렵지는 않겠죠. 아마도 한국 사람들은 몇번 중에 한번은 기회가 올 것이고, 그때는 16강 아니라 그 이상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이제는 그 이상의 성적이 매직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으니까요.
다음 언젠가의 월드컵에서는 꼭 보고 싶은 골이 있습니다. 이번에 단독돌파에 의한 골을 처음으로 그것도 두 번이나 보여주었죠. 다음에 보고 싶은 골은 스루패스 한방에 상대의 수비라인을 허물고 만든 골 (박주용이 대그리스전에서 이동국이 대우르구아이전에서 거의 될뻔했던), 2:1 패스로 상대수비를 유린하면서 넣은 골, 그리고 중거리슈팅이후 골기퍼가 잡아내지 못하고 놓친 공을 살짝 밀어넣는 골, 이렇게 3개입니다. 3골 모두, 엄청난 자신감, 경기를 지배하겠다는 도도함, 그리고 팽팽한 긴장에서도 정확성을 유지하는 기량과 정신력을 모두 필요로 합니다. 골 자체는 말로는 간단하지만, 그런 골이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시스템의 진전을 요구하죠. 저는 그렇게 될 것으로 믿습니다. 한국사회는 어쨋든 진전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