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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마음'(지상현 2011) 강추

(2011.7.26)

좀 읽은 지 시간이 지나면 맥이 빠져서 독후감 쓰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도 마음에 부채처럼 자리하고 있어서 청산을 하고자 합니다.

이 책은 부제가 책의 주제를 더 잘 드러내 줍니다. ‘오래된 미술에서 찾는 우리의 심리적 기질

저자의 경력이 이러한 융합적인 제목을 가능하게 했군요. 홍익대 미대 출신이면서 연세대에서 심리학과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책의 미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제가 가장 먼저 강조하고픈 바는 한국인과 한국문화에 대한 객관적 접근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이라는 게 어떤 면에서인지 그렇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지만, 적어도 작가가 객관적이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했고, 그래서 외적인 분석틀을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한국 문화에 대한 논평을 보다 보면 극단적인 존중과 혐오로 양분되어 버리는 경향이 있었죠. 저자는 이런 구도를 피하고 외적인 분석틀에 한국의 문화를 포지셔닝하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일제를 경험하면서 민족을 잃었다는 참담함은 한국인에게 두 가지 극단적인 자화상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애써서 긍정의 이미지를 획득하기에 사실의 왜곡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찬의 의지가 강했죠. 일제하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그런 경향이 컸죠. 실학을 유교에서 과도하게 차별화시킨 것, 자발적 근대화론 같은 경우가 그런 예겠죠. 문화에 있어서도 모든 것에 대해 예정이 넘치고 민족의 우수성을 고취하고픈 사고도 강했죠.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이었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1994)도 그런 느낌을 많이 주죠. 그분의 한국 문화에 대한 예정과 노력은 높게 평가하지만, “무량수전..”을 읽다 보면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글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이 약해집니다.

 

반면에, 극단적인 자기부정적 자화상을 그렸죠. 사실, 이게 다수의 반응이었죠. ‘조선 놈은 안되라는 표현을 요즘의 젊은 세대는 잘 모르거든요. 하지만, 저세대만해도 흔히 자조적으로 뇌까리는 표현이었습니다. 모든 부정적인 사례를 열거한 뒤에, ‘이래서 한국은 안돼와 같은 자조적 표현이 일상적이었거든요.

 

이런 극단적인 자조가 횡행했기 때문에 최순우의 책 무량수전..”이 신선했죠. 뒤쳐져 보였던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냈으니까요. 그런데 책이 출판된 시기(1994)는 실제 글들이 써진 시기보다 뒤죠. 회고록의 성격이 있으니까요. 제가 시기를 강조하는 것은 1990년대쯤 되어서는 한국인이 스스로에 대한 자화상이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는 경향이 강했다고 보이거든요. 꼭 긍정이라고까지는 아니더라도 객관적이라고만 해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워낙 자조적인 면이 커서,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죠. 최순우의 책이 꽤 반향이 있었던 것에는 이러한 사회적 변화가 있었던 거죠.

 

보다 그 시대분위기의 변화를 잘 드러내 준 게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1993)입니다. 유홍준의 책은 지금도 스테디셀러이지만, 당시 출판계에서는 혁명적인 책이었죠. 문화교양서가 베스트셀러가 된 최초의 사례였거든요. 그 자체로 이미 한국 사람들에게서 그동안 돌아보지 않았던 자기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저변에 기름처럼 깔려있다는 것이죠. 유홍준은 기름에 불을 붙인 것이죠. 유홍준의 책의 내용은 최순우의 책과도 그 tone이 다릅니다. 최순우가 어떻게든지 아름다음 또는 민족의 자부심을 강조할려는 게 보이지만, 그보다는 훨씬 더 담백하죠. 또한 민중적 체취가 강하구요. 유홍준이 이미 운동권 물을 먹었던 다른 세대라는 게 드러나죠. 유홍준의 포인트는 한국문화가 우수하다라는 것보다는 소중하다에 가깝겠죠.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것들에서 왜 그런 게 비롯되었는지, 지역의 사람들의 어떤 염원이나 감성을 반영한 것이라던지, 의미를 잘 들춰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강진을 다룬 대목이었던 것 같은데, 전라도 출신의 민중미술가(이름이 잘 생각이 안나네요)의 그림에서 흙은 온통 붉은 빛깔인데, 그게 얼추 민중적인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작가가 상상해낸 색깔이 아니라, 사실, 남도의 흙을 보면 붉은 빛깔이 돈다는 거죠.(김지하의 대표시 황토도 그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죠). 그래서 유홍준의 책을 보다 보면, 자랑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보다는 이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고, 그래서 소중하다는 생각도 드는 거죠. 그래서 저는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가 객관이라는 시각에서 한국문화에 대해 접근하고자 했던 최초의 대중적 시도였다고 봅니다(적어도 대중이 그 책에 열광하면서 책의 외연을 담당해줬다는 점에서).

 

저는 한국인의 마음’(지상현 2011)이 이러한 객관의 지향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당히 이론화의 성실함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야말로 논문으로도 충분히 서술될 수 있을 정도로 한국문화의 typology를 밝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많은 실례들과 더불어 아주 쉽게 접근하고 있어요. 작가가 이런 유형학적 접근을 시도한 동기는 한국의 전통미술을 보면서 의외로 현대적인 감각들이 돋보이는 게 많다는 거였어요. 달항아리 같은 게 그 예죠. 달항아리에서 현대의 미니멀리즘이 보이는 거죠. 이런 특징들이 저자가 일본에 머물면서 일본과 중국의 탁월한 미술품들을 많이 접했으면서도 그러한 현대성이 느껴지지는 않더라는 거에요. 그러면서 작가는 문화간에 다른 특징이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문화적 원형(융의 개념이죠)을 찾아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 차이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융의 성격분류 이론에서 출발하여 현대의 마케팅 또는 브랜드 컨설팅에 활용되는 성격유형 도식을 빌린 것이죠. 이 도식에서는 외향성-내향성이 수직축으로 남성성-여성성을 수평축으로 자리합니다. 외향성은 조(밝음)을 내향성은 울(슬픔)을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외향성과 내향성에도 남성과 여성의 두 측면이 있고 그에 따라서 다른 특징을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저자가 이런 도식에서 한국의 미술품으로부터 한국인의 성격을 주로 조와 울에 걸쳐 있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앞서의 이처럼 조와 울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를 매닉친화형으로 봅니다. 반면에 울이 주로 강하면 이것을 멜랑콜리친화형으로 보구요. 일본이 이렇다고 합니다. 멜랑콜리 친화형에서는 아주 집착이 강한데, 그래서 정교하고, 섬세하고 사실성 높은 미술품의 특징이 강하다고 합니다. 반면에 매닉친화형에서는 그런 면도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의 특징이 강해서 자기의 주관을 강조하고 호쾌하게 생략적인 미술품들이 많다는 거에요. 이런 측면들이 현대적인 감각도 통한다고 하구요.

 

또한 매닉친화형에서는 강렬한 색깔의 대비를 좋아한다고 하네요. 우리의 색동저고리, 단청 등이 그 예겠죠(이는 제 생각). 작가는 많은 보색 대비의 사례를 듭니다. 일월오봉도의 색깔들이 그렇다고 합니다. 이렇게 색상대비를 강조하기 때문에 형의 디테일에는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한국의 절의 사천왕상은 형 자체의 입체성은 없다고 해요. 색깔로 그 입체감을 드러낸다고 하구요. 반면에 일본 절의 사천왕상은 형의 정교함과 입체감이 훨씬 더 사실적이라고 하는 군요. 그렇게 화려한 색상을 좋아하는 것은 지중해 국가(이탈리 같은)들도 그렇다고 해요. 이게 일조량이 많은 지역의 특징이라나요. 이런 지역은 동공이 갈색이 되고 채도 높은 적황색을 좋아한다고 해요. 우리가 요즈음 한국의 색상들이 너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면도 있는데 막상 그런 맥락에서 보니까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싶어요.

 

그런데 이런 매닉친화형의 기질에서 한국을 이해할 수 있겠는데(한국은 바쿠스의 나라같다는 외국인의 감상 같은 것이 이해가 되는 거죠), 계속 이렇게 가야만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최근, 한국을 떠나는 르노 삼성의 사장은 한국에서 사업한다는 것은 F1 자동차 모는 것과 비슷하다고 비유합니다. 한편으로는 역동성이라는 면에서 좋게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정신 사납죠. 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구요. 객관이란 영역이 너무 작은 것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성숙해가면 그만큼 사회의 안정적인 공통기반이 확보가 필요하죠. 그런데 아직은 한국 사람들이 나는 나와 같은 굉장히 주관적인 태도를 많이 취하고 있다는 거죠. 골상 연구하는 조용진 교수는 한국인이 우뇌가 상대적으로 좌뇌에 비해 크다고 하죠. 그래서 좋은 점도 많지만, 굉장히 불안정하다고 하면서 뇌의 밸런스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기질이나 태도를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결정론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지상현도 예로 들고 있듯이 사회적으로 검약과 절제를 강조했던 조선 시대의 미술은 상대적으로 울(내향성)의 경향이 강하다고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경향이 발현되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한국 사람의 기질을 바꾼다는 것보다는 이미 한국 사회가 다른 성격을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최근 복지 제도에 대한 관심이 많아지는 것도 안정성에 대한 요구가 반영된 것이겠죠. 청룡열차에 운명을 맡겼던 시기에서 충분히 속도 제어를 할 수 있는 승용차를 원하는 것이죠. 그런데 승용차는 여전히 역동적이죠. 충분히 제어할 수 있는 역동성이죠. 마치, 뉴욕이나 실리콘 밸리가 정신 사나운 곳은 아니면서도 여전히 활력이 넘치는 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발전적 진화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 몇 가지 추가 ---

- 매닉친화형과 관련해서 최근 엄청난 조명을 받고 있는 임재범이 잘 연결되죠. 엄청난 열정과 더불어 엄청난 우울을 안고 있죠. 한국 사람들이 이러한 임재범에서 페르소나를 발견하구요.

 

- 유홍준은 문화에 대해 적절한 커멘트를 한 적이 있습니다. 제발 자기 문화가 원류고 최고라는 생각에서 자유롭자고. 르네상스가 이탈리에서 시작했다고 해서 그럼 모든 유럽의 르네상의 문화의 성과가 고스란히 다 이탈리아 것이고 그래서 이탈리아가 우수한 나라냐는 것이죠. 문화는 배타적인 영유권이 아니고 어디서 출발했건 많은 사람들이 향유하면 그것이 또한 문화라는 것이죠. 이런 시각이 있어서 유홍준의 문화 비평이 객관적일 수 있다는 것이고 지금 시대 흐름에 맞다는 거죠.

 

- 탁석산이 한국인은 무엇으로 사는가”(2008) 에서 독특하게 한국에 대한 평을 합니다(그리고 아마도 한국의 정체성”2008에서도). 현대의 한국은 조선의 한국과는 다르다는 것이죠(저는 이것을 문화구성체로 개념화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이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탁석산이 한편으로는 한국지상주의적인 생각과 결별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데, 너무 반대로 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반대로 문화의 연계성이 크다고 보거든요. 이것을 무시하면 그만큼 오류에 사로잡힐 수 있구요. 그리고 문화의 연계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국수주의적인 함정에 빠진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인간이 갖는 역사성은 무시할 수 없거든요. 역사를 잘 알고 소중히 여기되, 얼마든지 새로운 가치와 질서의 창출은 가능하거든요. 탁석산의 시각과는 다른 저의 견해를 담은 글.

http://desica.tistory.com/entry/열하일기를-통해서-근세의-한국의-지식인을-복원해봅니다

 

-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깊다보면 자기 것에 대한 애정이 낯간지럽게 표출될 수도 있죠. 하지만, 역시 관심은 갖아야죠. 다만, 자기 문화가 뛰어나서 갖는 게 아니라, 자기의 소속 문화가 인류의 자신이라는 대자적인 생각에 기반해야죠. 인류의 문화를 가꿈에 있어서 특히 문화에의 준거 집단의 역할은 크죠. 가장 그 문화를 잘 이해하니까요. 이렇게 자기의 소속 문화에 대한 객관적인 태도로 존경심을 갖는 것은 필요합니다. 다만, 자기 문화뿐만 아니라 타 문화에도 그만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겠죠. 여력이 된다면 타 문화에 대해서도 보존과 가치탐구에 일조해야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