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7.12)
지난 주 목요일엔가 택배로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만들어 정신을 포맷하는 정치>(크리스티앙 살몽 지음, 류은영 옮김)(2008, 원저는 2007)로 받아들고서 주말까지 독서에의 참을 수 없는 몰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배달된 책을 얼추 볼려고 했는데, 책을 덮기가 어려웠습니다.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스토리>는 제가 마음에 품고 있는 주제의식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지식>과 부합하지는 않습니다만, 저의 그동안 heuristic approach에 대해 상당 정도의 이론기반(foundation)을 제공해줍니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지식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 생각을 해오고 있습니다. 보통 이야기하면 지식과는 거리가 멀거나 오히려 지식과 상충하는 것(속이는 것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저의 생각은 역설적이죠. 그래서 짤막한 에세이를 써보곤 하면서도 이에 대한 학문기반까지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리>를 보니까 그 기반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연결되어 있는 거에요. 제가 아주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싶으니까 엄청 반가왔던 것이지요.
스토리텔링하면 떠오르는 정의는 기왕의 컨텐츠들을 독자나 청중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는 몰입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컨텐츠 자체보다는 그것을 잘 배치하는 형식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면이 있죠. 그런 면에서 기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구요. 좀 사기성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죠. 그런데 스토리텔링 또는 그러한 구성 그 자체가 컨텐츠가 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이 <스토리>의 주제입니다. 이미 정치, 경영 등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의 소견과도 맥락을 같이 하구요.
스토리는 좀 작은 아기자기한 스케일이고 서사(narrative)라고 하면 좀 큰 것으로 개념이 다가오죠. 서사는 호머에서 시작해서, 셰익스피어 등의 웅장한 이야기로 보통 이해되죠. 그런데 그만큼 지어낸 허구라는 측면도 있죠. Roland Barthes는 서사학을 개념화(narratology)한다고 합니다. 서사는 어디에나 언제나 어떤 집단에게도 존재하며 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의 대범주라고 합니다. 이러한 Barthes의 시도가 포스트모더니즘 기획의 일환이겠죠.("들어가며") 구조주의자인 레비는 서사를 분석하였고, 후기구조주의자인 들뢰즈나 푸코같은 이들은 서사에 천착한 듯합니다. 들뢰즈는 미국의 역사 역시 서사로 해석합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매클로스키는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서사학이라고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같은 곳)
그런데 <스토리>의 저자 살몽은 그러한 서사가 정치와 경영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될 것으로 Barthe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와 경영에서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이전에 기업경영에서는 브랜드 경영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제1장 로고에서 스토리로). 나이키가 그런 경우죠. 하지만, 나이키 브랜드가 후진국에서의 저임노동 폭로와 맞물리면서 단박에 선망의 브랜드에서 노동착취의 브랜드로 이미지화된다는 것이죠(안티브랜드 운동). 그러면서 브랜드전략이 퇴조하고 기업이 감동적인 대상으로 여겨지도록 이야기를 개발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공정무역과 같은 것도 그러한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죠. 그래서 브랜드와 마케팅을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전혀 새롭게 조직하게 된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담긴 이야기를 조직해내죠.
이야기하기는 고객뿐만 아니라 기업내에서도 각광을 받습니다. (제2장 셰익스피어 매니지먼트) 과거엔 침묵이 미덕이었죠. 산업혁명기 영국의 노동자는 말이 없다고 자본가들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이 없는 조직은 위험한 조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의 침묵(organizational silence)는 조직실패의 85%를 설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게끔 조직화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런 경영의 새로운 경향은 정치와 같이 갑니다. 대중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경영과 정치가 유사하죠. 이것은 아주 새롭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5장 정치의 스토리화) 워터게이트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수사적으로 허구적 이야기를 개발하는 것에서 spin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이것을 맡는 사람을 spin doctor(정치 커뮤니케이션 고문)라고 합니다. 기존의 언론을 우회한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여론담당으로 유명한 새파이어가 이때도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빌클린턴 역시 이들(제임스 카빌)의 도움을 많이 받았구요. 이러한 새로운 홍보전략은 더 발전에서 에번 코르노그가 story spinner란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칼 로브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죠. 이들은 특히 조지 W. 부시의 재선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중동전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부시가 곤경에 처하기 쉬었는데, <애슐리 이야기>라는 정치광고가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부시는 등장하지 않지만 부시는 복음서의 예언자같은 위치로 은연중에 위치지워지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존 캐리는 정책으로 승부하고 싶었지만 대중에게 별로 먹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래서 현대의 대통령은 더이상 정책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의 한 복판으로 자기를 밀어넣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대통령이라고 하구요. 오바마 역시 이러한 훌륭한 예가 되구요. 사르코지 역시 그런 전략을 채용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략을 '세헤라자데전략'이라고 이름붙이는 군요.
이밖에도 전쟁의 시뮬레이션과 스토리화(할리우드의 스토리와 IT가 만나서 병사들을 이렇게 이야기 설정 속의 actor로 훈련시킨다고 합니다-이것은 또한 병사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스토리를 따라서 행동할 뿐이라는 거죠), 프로파겐다 등은 스토리기법으로 재구성된다고 합니다 (프로파겐다 자체가 외국선교사들을 보좌하고 감시하는 추기경회로서 체제선전의 기법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뉴스 역시 거짓말 산업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상업방송인 Fox 가 뉴스를 이런 식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막후에서의 정부의 스토리를 가져다가 뉴스화시킨다는 것이죠.
이렇게 전반적으로 저자는 스토리의 위력을 짚어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스토리텔링은 대중을 속이는 면도 있겠지만, 사실은 대중이 보다 중요하게 부각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정책을 말하고 기업이 상품을 설명할 때 대중은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조직내에서도 마찬가지이죠. 위계상 위에 있는 사람이 설명을 하고 지시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위계적이고 로고스적인 관계가 이제는 수평적이고 감성적인 관계(에토스)인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죠. 이러한 면에서 스토리/스토리텔링은 모더니즘적이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 맞죠.
이것은 중대한 변화인데, 어느 시대에도 그렇듯이 중대한 변화에는 적응/부적응, 승자/패자, 효용/악용이 모두 교차하죠. 저는 해악의 측면뿐만 아니라, 그 기여의 측면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의성이 높은 기업 또는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기업들은 내부구조도 사무실 같지 않은 구조를 채용하고 있다고 하죠. 이게 과연 기업인지 헷갈리게 한다고 하구요. 더이상은 코드화되거나 문서화된 지식이나 정보는 이제 새로운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거에요. 한때 지식경영과 같은 데서 어떻게 하면 지식을 잘 집결시켜서 활용하게 할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고 실제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지식은 이미 효용이 떨어지는 평범한 것들이죠. 정말 중요한 지식은 암묵적이고 찰나적인 교감에 의해서 전달되죠. 그래서 수평적이고 탈구조화되는 것을 강조하구요(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것 자체도 목적의식적으로 기획되는 것이기도 하죠)
소비자 역시 이미 제품과 기술에는 신물이 나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신제품과 신기술이 쏟아져서 또한 순식간에 사라지죠. 신제품과 신기술은 더이상 '새롭지' 않은 흔한 것입니다. 이제 모더니즘적인 '기능'이라는 것은 무의미하죠. 과거 소니가 아날로그제품들에서 기능들을 엄청나게 늘리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죠. 그리고 최근엔 한국의 휴대폰업체들이 역시 비슷한 오류를 범하다가 실패하구요. 정작 시장에서는 애플의 아이폰에 열광하죠. 아이폰 자체는 하드웨어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소비자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유연한 그릇 역할을 한 것이죠. 소비자를 기능을 사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것이죠. 애플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타자지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죠. 더 이상 기술로만 개념화할 수 없는 타자지향성은 다시 스티브잡스가 모토로 내세우는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인 것이기도 하죠.
스토리는 한때의 모더니즘적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로 전환의 당연한 귀결이면서 동시에 상징이겠죠. 한때 지식의 대표격이 과학과 기술이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각광받지 못하죠. 지식의 왕이었던 물리학(대표적인 physical science)은 1990년대 초반 대형입자가속기의 펀딩 중단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퇴조하죠. 반면에 physical science의 입장에서는 느슨한 과학이었던 life science는 확장일로에 있게 되죠. 비록 원인과 결과가 physical science처럼 명료하지는 않지만, life science는 결국 인간을 포함한 생태지향적이죠. (물론 life science는 제약업계의 이해 등의 정치경제학적 맥락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가장 로고스적인 언어인 물리학이 현실에서 좌절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컨텐츠가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내적인 정밀성이 아니라,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의 미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죠. 수학적 논리는 이러한 이야기내에 숨거나
적절한 통제하에 배치되어야 겠죠. 노벨상을 수상한 이론물리학자인 와인버그 역시 설득력 있는 수사가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끌어온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들어가며"). 아이폰에서 보여주덧이 탁월한 기술이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의 교감 또는 인터페이스가 그러합니다. 기술은 그 교감을 뒷받침하는 기반일 뿐이죠. 이러한 교감을 스토리가 대표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느 정도는 과학논문 역시 잘 팔리기 위해서는 또는 임팩트가 높은 저널에 실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구성하거나 또는 기존의 이야기의 맥락에 잘 맞아들어가야 합니다. 논문이 시사하는 바가 감동이나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기로 끝나고 말았지만 황우석은 그런 시도를 많이 했고 그래서 드라마틱하게 사이언스 저널에 입성했던 것이죠.
이공계학생들에게 복잡한 수식이나 그림들을 무표정하게 쓰도록 가르치면 안되겠죠. 물론 사기를 치라는 것은 아니죠. 과거엔 그러한 행위가 그래도 존경받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죠. 유려한 스토리를 펼쳐야 합니다. 엄격한 이론전개는 기본으로 장착하구요. 정말로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죠.
이처럼 과학기술이 '흔해지면서' 더이상 그 자체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것은 학문에 있어서도 다양한 접경학문 내지는 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됩니다. 과학기술사회학 등에서는 더 이상 과학기술을 그 자체의 내재적 발전논리만으로 보지 않죠.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사회적 구성론), 또는 과학이 사회를 구성한다고도 보죠(파스퇴르의 예-라투르). 홍성욱의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1999, 문학과지성사)의 여러 장들이 이러한 논의를 담고 있으며 책의 제목 자체에 이미 문화라는 인문적 개념이 자리하고 있죠. 홍성욱의 <과학은 얼마나>(2004, 서울대학교)의 3장은 과학과 인문이라는 두 문화 사이의 대화의 가능성을 논의합니다. 홍성욱의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융합시대의 과학문화>(2008)는 과학을 예술, 건축, 언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홍성욱을 비롯하여 과학기술을 사회학, 역사학, 또는 철학이라는 인문사회과학의 측면에서 보는 경우 아직은 접면에 서서 대화를 강조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면 (쉽지 않은 한 발이지만), 과연 인문학과 과학이 뭐가 그렇게 다른지도 생각해볼만합니다. 윌슨의 <conscillence>(통섭으로 번역된)는 다분히 과학의 입장에서 인문학을 포섭하고자 하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인 접근이죠. 반대로 인문학의 입장에서 과학을 포섭해서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있어서 시도해볼만하지 않을까요. 물론 홍성욱의 홍성욱의 책들에서 소개한 대로 정통적인 과학자들(와인버그 포함)은 펄쩍 뛰지만 (과학은 그 자체의 논리적 맥락이 있다고 보니까요). 또한 일부 과학자들은 상대적으로는 적어도 대화는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과학자들은 이론 역시 이야기로 구성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설명한닫던지, 또는 대칭이론에서처럼 예술적인 감흥과 함께 설명한다던지(예술언어를 채용한다던지). 물론 제 잠정적인 생각은 이보다도 좀 더 나가있을 수 있구요. 그런데 아직은 저 역시 정확한 개념화와 substance를 제공하는 수준에는 멀지만요.
지난 주 목요일엔가 택배로 <스토리텔링: 이야기를 만들어 정신을 포맷하는 정치>(크리스티앙 살몽 지음, 류은영 옮김)(2008, 원저는 2007)로 받아들고서 주말까지 독서에의 참을 수 없는 몰입이 시작되었습니다. 배달된 책을 얼추 볼려고 했는데, 책을 덮기가 어려웠습니다. 단숨에 다 읽었습니다.
<스토리>는 제가 마음에 품고 있는 주제의식인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지식>과 부합하지는 않습니다만, 저의 그동안 heuristic approach에 대해 상당 정도의 이론기반(foundation)을 제공해줍니다. 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지식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지 생각을 해오고 있습니다. 보통 이야기하면 지식과는 거리가 멀거나 오히려 지식과 상충하는 것(속이는 것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점에서 저의 생각은 역설적이죠. 그래서 짤막한 에세이를 써보곤 하면서도 이에 대한 학문기반까지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스토리>를 보니까 그 기반의 모든 것은 아니지만 연결되어 있는 거에요. 제가 아주 부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싶으니까 엄청 반가왔던 것이지요.
스토리텔링하면 떠오르는 정의는 기왕의 컨텐츠들을 독자나 청중이 잘 이해할 수 있고 심지어는 몰입할 수 있게끔 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컨텐츠 자체보다는 그것을 잘 배치하는 형식같은 것으로 이해되는 면이 있죠. 그런 면에서 기술적인 것으로 치부되기도 하구요. 좀 사기성이 있다고 여겨지기도 하죠. 그런데 스토리텔링 또는 그러한 구성 그 자체가 컨텐츠가 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이 <스토리>의 주제입니다. 이미 정치, 경영 등에서 현실화되고 있다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저의 소견과도 맥락을 같이 하구요.
스토리는 좀 작은 아기자기한 스케일이고 서사(narrative)라고 하면 좀 큰 것으로 개념이 다가오죠. 서사는 호머에서 시작해서, 셰익스피어 등의 웅장한 이야기로 보통 이해되죠. 그런데 그만큼 지어낸 허구라는 측면도 있죠. Roland Barthes는 서사학을 개념화(narratology)한다고 합니다. 서사는 어디에나 언제나 어떤 집단에게도 존재하며 이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지식의 대범주라고 합니다. 이러한 Barthes의 시도가 포스트모더니즘 기획의 일환이겠죠.("들어가며") 구조주의자인 레비는 서사를 분석하였고, 후기구조주의자인 들뢰즈나 푸코같은 이들은 서사에 천착한 듯합니다. 들뢰즈는 미국의 역사 역시 서사로 해석합니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자인 매클로스키는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서사학이라고 견해를 제시하기도 합니다. (같은 곳)
그런데 <스토리>의 저자 살몽은 그러한 서사가 정치와 경영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은 될 것으로 Barthe도 예견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1990년대를 거치면서 정치와 경영에서는 스토리텔링 기법이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이전에 기업경영에서는 브랜드 경영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제1장 로고에서 스토리로). 나이키가 그런 경우죠. 하지만, 나이키 브랜드가 후진국에서의 저임노동 폭로와 맞물리면서 단박에 선망의 브랜드에서 노동착취의 브랜드로 이미지화된다는 것이죠(안티브랜드 운동). 그러면서 브랜드전략이 퇴조하고 기업이 감동적인 대상으로 여겨지도록 이야기를 개발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공정무역과 같은 것도 그러한 이야기를 구성하는데 도움이 되는 거죠. 그래서 브랜드와 마케팅을 이야기라는 관점에서 전혀 새롭게 조직하게 된다고 합니다. 스티브 잡스는 제품의 기능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에 담긴 이야기를 조직해내죠.
이야기하기는 고객뿐만 아니라 기업내에서도 각광을 받습니다. (제2장 셰익스피어 매니지먼트) 과거엔 침묵이 미덕이었죠. 산업혁명기 영국의 노동자는 말이 없다고 자본가들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말이 없는 조직은 위험한 조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조직의 침묵(organizational silence)는 조직실패의 85%를 설명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이 이야기하게끔 조직화한다는 것입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런 경영의 새로운 경향은 정치와 같이 갑니다. 대중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점에서 경영과 정치가 유사하죠. 이것은 아주 새롭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5장 정치의 스토리화) 워터게이트사건에 대응하기 위한 수사적으로 허구적 이야기를 개발하는 것에서 spin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고 이것을 맡는 사람을 spin doctor(정치 커뮤니케이션 고문)라고 합니다. 기존의 언론을 우회한다는 뜻이었다고 합니다. 여론담당으로 유명한 새파이어가 이때도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빌클린턴 역시 이들(제임스 카빌)의 도움을 많이 받았구요. 이러한 새로운 홍보전략은 더 발전에서 에번 코르노그가 story spinner란 개념을 만들어 냅니다. 칼 로브같은 사람이 이에 해당하죠. 이들은 특히 조지 W. 부시의 재선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중동전이 지지부진해지면서 부시가 곤경에 처하기 쉬었는데, <애슐리 이야기>라는 정치광고가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킨다고 합니다. 부시는 등장하지 않지만 부시는 복음서의 예언자같은 위치로 은연중에 위치지워지게 했다고 합니다. 당시 존 캐리는 정책으로 승부하고 싶었지만 대중에게 별로 먹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래서 현대의 대통령은 더이상 정책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의 한 복판으로 자기를 밀어넣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대통령이라고 하구요. 오바마 역시 이러한 훌륭한 예가 되구요. 사르코지 역시 그런 전략을 채용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전략을 '세헤라자데전략'이라고 이름붙이는 군요.
이밖에도 전쟁의 시뮬레이션과 스토리화(할리우드의 스토리와 IT가 만나서 병사들을 이렇게 이야기 설정 속의 actor로 훈련시킨다고 합니다-이것은 또한 병사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스토리를 따라서 행동할 뿐이라는 거죠), 프로파겐다 등은 스토리기법으로 재구성된다고 합니다 (프로파겐다 자체가 외국선교사들을 보좌하고 감시하는 추기경회로서 체제선전의 기법을 의미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뉴스 역시 거짓말 산업이 된다고 합니다. 미국의 상업방송인 Fox 가 뉴스를 이런 식으로 만든다고 합니다. 막후에서의 정부의 스토리를 가져다가 뉴스화시킨다는 것이죠.
이렇게 전반적으로 저자는 스토리의 위력을 짚어보면서 동시에 그에 대해 비판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다른 관점에서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스토리텔링은 대중을 속이는 면도 있겠지만, 사실은 대중이 보다 중요하게 부각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대통령이 정책을 말하고 기업이 상품을 설명할 때 대중은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죠. 이것은 조직내에서도 마찬가지이죠. 위계상 위에 있는 사람이 설명을 하고 지시하면 아래에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위계적이고 로고스적인 관계가 이제는 수평적이고 감성적인 관계(에토스)인 관계로 전환하는 것이죠. 이러한 면에서 스토리/스토리텔링은 모더니즘적이기보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것이 맞죠.
이것은 중대한 변화인데, 어느 시대에도 그렇듯이 중대한 변화에는 적응/부적응, 승자/패자, 효용/악용이 모두 교차하죠. 저는 해악의 측면뿐만 아니라, 그 기여의 측면도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창의성이 높은 기업 또는 모두가 가고 싶어하는 기업들은 내부구조도 사무실 같지 않은 구조를 채용하고 있다고 하죠. 이게 과연 기업인지 헷갈리게 한다고 하구요. 더이상은 코드화되거나 문서화된 지식이나 정보는 이제 새로운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거에요. 한때 지식경영과 같은 데서 어떻게 하면 지식을 잘 집결시켜서 활용하게 할지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고 실제 기업에서 활용되고 있죠. 하지만, 이러한 지식은 이미 효용이 떨어지는 평범한 것들이죠. 정말 중요한 지식은 암묵적이고 찰나적인 교감에 의해서 전달되죠. 그래서 수평적이고 탈구조화되는 것을 강조하구요(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것 자체도 목적의식적으로 기획되는 것이기도 하죠)
소비자 역시 이미 제품과 기술에는 신물이 나 있습니다. 너무나도 많은 신제품과 신기술이 쏟아져서 또한 순식간에 사라지죠. 신제품과 신기술은 더이상 '새롭지' 않은 흔한 것입니다. 이제 모더니즘적인 '기능'이라는 것은 무의미하죠. 과거 소니가 아날로그제품들에서 기능들을 엄청나게 늘리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하죠. 그리고 최근엔 한국의 휴대폰업체들이 역시 비슷한 오류를 범하다가 실패하구요. 정작 시장에서는 애플의 아이폰에 열광하죠. 아이폰 자체는 하드웨어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소비자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유연한 그릇 역할을 한 것이죠. 소비자를 기능을 사용하는 대상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있게 한 것이죠. 애플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타자지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죠. 더 이상 기술로만 개념화할 수 없는 타자지향성은 다시 스티브잡스가 모토로 내세우는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인 것이기도 하죠.
스토리는 한때의 모더니즘적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적 사회로 전환의 당연한 귀결이면서 동시에 상징이겠죠. 한때 지식의 대표격이 과학과 기술이 이제는 더이상 그렇게 각광받지 못하죠. 지식의 왕이었던 물리학(대표적인 physical science)은 1990년대 초반 대형입자가속기의 펀딩 중단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함께 퇴조하죠. 반면에 physical science의 입장에서는 느슨한 과학이었던 life science는 확장일로에 있게 되죠. 비록 원인과 결과가 physical science처럼 명료하지는 않지만, life science는 결국 인간을 포함한 생태지향적이죠. (물론 life science는 제약업계의 이해 등의 정치경제학적 맥락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지만)
가장 로고스적인 언어인 물리학이 현실에서 좌절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컨텐츠가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내적인 정밀성이 아니라,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로의 미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죠. 수학적 논리는 이러한 이야기내에 숨거나
적절한 통제하에 배치되어야 겠죠. 노벨상을 수상한 이론물리학자인 와인버그 역시 설득력 있는 수사가 수백만 달러의 연구비를 끌어온다고 주장했다고 합니다("들어가며"). 아이폰에서 보여주덧이 탁월한 기술이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와의 교감 또는 인터페이스가 그러합니다. 기술은 그 교감을 뒷받침하는 기반일 뿐이죠. 이러한 교감을 스토리가 대표하는 것이죠. 그리고 어느 정도는 과학논문 역시 잘 팔리기 위해서는 또는 임팩트가 높은 저널에 실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잘 구성하거나 또는 기존의 이야기의 맥락에 잘 맞아들어가야 합니다. 논문이 시사하는 바가 감동이나 드라마가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사기로 끝나고 말았지만 황우석은 그런 시도를 많이 했고 그래서 드라마틱하게 사이언스 저널에 입성했던 것이죠.
이공계학생들에게 복잡한 수식이나 그림들을 무표정하게 쓰도록 가르치면 안되겠죠. 물론 사기를 치라는 것은 아니죠. 과거엔 그러한 행위가 그래도 존경받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하죠. 유려한 스토리를 펼쳐야 합니다. 엄격한 이론전개는 기본으로 장착하구요. 정말로 훨씬 더 어려워진 것이죠.
이처럼 과학기술이 '흔해지면서' 더이상 그 자체로 대접받기 어렵다는 것은 학문에 있어서도 다양한 접경학문 내지는 논의로 이어진다고 생각됩니다. 과학기술사회학 등에서는 더 이상 과학기술을 그 자체의 내재적 발전논리만으로 보지 않죠. 사회적으로 구성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사회적 구성론), 또는 과학이 사회를 구성한다고도 보죠(파스퇴르의 예-라투르). 홍성욱의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1999, 문학과지성사)의 여러 장들이 이러한 논의를 담고 있으며 책의 제목 자체에 이미 문화라는 인문적 개념이 자리하고 있죠. 홍성욱의 <과학은 얼마나>(2004, 서울대학교)의 3장은 과학과 인문이라는 두 문화 사이의 대화의 가능성을 논의합니다. 홍성욱의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 융합시대의 과학문화>(2008)는 과학을 예술, 건축, 언어 등 다양한 측면에서 재조명하고 있습니다.
홍성욱을 비롯하여 과학기술을 사회학, 역사학, 또는 철학이라는 인문사회과학의 측면에서 보는 경우 아직은 접면에 서서 대화를 강조하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여기서 한발 더 나간다면 (쉽지 않은 한 발이지만), 과연 인문학과 과학이 뭐가 그렇게 다른지도 생각해볼만합니다. 윌슨의 <conscillence>(통섭으로 번역된)는 다분히 과학의 입장에서 인문학을 포섭하고자 하는 기획이라는 점에서 모더니즘적인 접근이죠. 반대로 인문학의 입장에서 과학을 포섭해서 이야기로 구성하는 것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있어서 시도해볼만하지 않을까요. 물론 홍성욱의 홍성욱의 책들에서 소개한 대로 정통적인 과학자들(와인버그 포함)은 펄쩍 뛰지만 (과학은 그 자체의 논리적 맥락이 있다고 보니까요). 또한 일부 과학자들은 상대적으로는 적어도 대화는 필요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탁월한 과학자들은 이론 역시 이야기로 구성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설명한닫던지, 또는 대칭이론에서처럼 예술적인 감흥과 함께 설명한다던지(예술언어를 채용한다던지). 물론 제 잠정적인 생각은 이보다도 좀 더 나가있을 수 있구요. 그런데 아직은 저 역시 정확한 개념화와 substance를 제공하는 수준에는 멀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