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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비전으로서 동양의 공동체주의와 서양의 자유주의의 융합

[인류의 비전으로서 이동양의 공동체주의와 서양의 자유주의의 융합]

https://www.facebook.com/KIM.Seokhyeon.ik/posts/4341135222564953

코로나 판데믹이 전개되는 양상은 사람들의 통상적인 예상과는 정반대였습니다. 통상적인 예상은 사회 시스템이 갖춰지고 과학기술 수준도 높은 서양이 방어하고 동양은 그렇지 못할 것이다였고 이는 중국에서 발발한 이후 한동안 그런 듯했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에서 본격화된 코로나 대유행 이후, 유럽, 미국에 이르러 상황은 정반대로 전개되었습니다. 이러한 충격적인 사태 전개를 보면서, 제한적인 또는 가설적인 한계에서 원인을 짚어보고 해결책도 제시해보고자 했습니다.

 

저는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 내재된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방기되고 개인주의(laissez-faire) 편향이 강해진 것으로 봅니다. 반대로 동양사회는 보통 집단주의/전체주의로만 좁혀져 이해되는 이면에 공동체주의가 존재하고 그것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서구의 리버럴리즘에서는 긍정적인 점에서 공동체주의의 재인식과 사회에 제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며, 반대로 동양사회는 비록 공동체주의의 긍정성이 이번 판데믹에 드러났지만 여전히 사회 전반에서 억압적일 있는 집단주의/전체주의는 극복해야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동양=공동체주의(집단주의), 서양=자유주의(개인주의)라는 도식을 설정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라서 역사적 맥락을 유럽 아시아라는 문명 형성까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었고, 양자의 대립구도와 동시에 상호침투도 오랜 역사적 맥락이 있어서 조망했습니다.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차이를 이해하고 미래의 비전을 제시함에 있어서 이해의 폭을 넓혀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3714938721922346&id=1395424620540446

 

--인용

코비드-19 동양사회의 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 서양사회의 자유주의(liberalism) 두드러지게 했다. 코비드-19 극복과정 그리고 나아가 인류의 가치관의 정립은 양자의 장점이 융합되고 각자의 편향인 집단주의/전체주의와 개인주의(laissez-faire) 극복되어저야 한다. 본고는 동양사회와 서양사회가 차별화된 가치관을 내면화시켜온 역사를 돌아보고, 이제 양자가 서로를 존중하면서 쌍방의 장점을 수렴할 것을 제안한다. ----인용 셋째, 자유주의(liberalism) 내재된 공동체 가치(communitarianism) 재발견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 단지 이기주의로 여겨져서는 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지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지만, 다만 의지가 남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 조건에서만 그러하다. 자신의 의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남의 그것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그래서 자유주의에는 공동체나 사회에 대한 개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군주제가 무너지고 자유주의 사회가 세워지자 자유주의는 정부에 대한 관점을 놓고 분화했는데, 사회적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로의 분화이다. 후자는 개인주의적 자유를 정부 위에 두지만, 전자는 정부를 사회적 결집과 안전을 위한 집합적 의지로 간주한다. 이는 지금의 코로나 방역 관련된 대립도 이에 연유한다. 어떤 사회는 방역통제를 위하 최선을 이끌기 위해 정부에 많은 재량권을 부여하지만 다른 사회는 정부의 방역노력을 개인에 대한 과도한 통제로 간주한다. 정부가 감염된 사람들의 접촉을 추적하면,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일정하게 양보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역은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도우며 그래서 자유주의를 위배하지 않은데 자유주의는 로크의 인용에서처럼 남들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재산을 해치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아니고 실은 자유주의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선제적 방역에 굳건한 입장 자체는 자유주의에 반대되지는 않는다. 동아시가 국가들은 전통적인 집합주의나 공동체주의 덕에 선제적 방역에 있어 강한 컨센서스를 보다 쉽게 형성할 있으나, 독일, 뉴질랜드, 호주, 이탈리아 등의 서구 국가 역시 유사한 입장을 취할 있었다(이탈리아는 그와 같은 입장을 1 파동 때의 심각한 손실 후에 취했다). 자유주의의 원래 정신을 존중하는 선제적 방역에 대한 컨센서스를 형성할 있다. 다만 개인주의적(laissez-faire) 자유주의가 강한 사회들만이 선제적 방역에 대해 소극적인 면이 있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강점이 있으나, 항상 적절했다고는 없으며 그래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개입에 의해 수정되어 왔다. 19세기 아이들을 포함한 노동자를 착취했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경제는 노동법의 등장에 의해 비로소 규제되었다. 20세기 전환기의 독점자본은 반독점법의 등장에 의해 규제되었다. 1930년대의 공황은 확장정책을 주저하지 않은 케인즈주의적 정부에 의해 해결되었다. 2 대전 이후에는 실업과 같은 불행을 사회적인 문제로 규정한 복지국가의 개념이 등장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횡행했었는데, 결국 2008-9 금융위기로 귀결되었고 케인즈주의적 개입을 불렀다. 이제 코로나19 치명적일수록, 사회적 또는 공동체적(social or communitarian) 가치가 재평가된다. 개인은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와지는데, 다만 사회, 개별 국가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와질 때만 그러하다. 이것은 심각한 위협이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는 결집해서 해법을 궁리하고 도달해왔다. 코로나19 극복되면, 세계는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는 아니고 새로운 지평 위로 올라설 것이다.

 

http://intelligencekor.kr/periodical/article.html?bno=16

 

코비드-19 판데믹, 동양과 서양을 돌아보게 하다

 

김석현.   first upoaded: 2020-12-31.   last updated: 2020-12-31. 

 

 

1. 서론


중국의 우한에서 시작되었다고 통상적으로 간주되는 코비드-19(Covid-19) 세계에 영향을 미쳐왔고 향후에도 그럴 것으로 여겨져서 심지어 A.C. B.C. 새롭게 코로나 전과 후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새로운 의미부여처럼, 코비드-19 보건과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와 문화에까지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코비드-19 대한 광범위한 토론과 미래예상이 전개되어 왔다. 가지 갈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유럽이나 북미국가들보다 감염병 통제를 했다는 판단에 기반한 동양과 서양에 대한 이분법의 재부상이다. 평가 자체는 그렇게 의문시되지는 않으나, 그에 대한 원인, 해석, 가치판단은 향후 엄격한 토론을 거칠 것이다. 글은 향후 생산적인 논의를 기대하면서 하나의 디딤돌로서 시도되는 바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감염병 통제는 감염자와 접촉으로 감염되었을 사람들을 추적하는 것이며, 접촉자들을 진단하고 감염된 사람들을 격리시키고 진단시키는 방식이다. 이러한 방식은 한국에서 특히 두드러져서, BBC 뉴스는 한국의 성공적인 방역에 대한 기사의 제목을 번역하면추적, 진단, 치료 정하기도 했다.[1] 이러한 방식은 감염확산을 막는데는 확실히 효과적인데, 감염자의 과거 사적인 행적은 적어도 방역당국에는 노출되게 된다. 그래서 그러한 방식을 채택하고자 했던 유럽의 정부들은 사생활옹호측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초래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프랑스에서는 이에 대한 사회적 토론 중에, 변호사인 프라델(Pradel), 그러한 방식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 국가[한국과 대만] 개인 자유의 모델이 아니라 최악이라고 Les Echos 기고한 글에서 비판한 있다.[2] 이러한 부정적인 입장은 일반화시키기에는 너무 강한 것이지만, 많은 서구인들은 어느 정도는 우려를 공유하는 듯하다. 좌파 철학자 지젝(Zizek) 그의 우려를인간의 얼굴을 야만-불안과 동정심에 기대고 전문가 의견으로 정당화된 생존주의라고 표현한 있다.[3]

동아시아적 추적 방식은 한편으로는 부정적 평가도 받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국가들 내에서는 동아시아 국가들과 같은 방식을 수행하지 못하는 가에 대한 한탄도 있다. 그러한 한탄은 서구 미디어로 하여금 동아시아 국가들에게 관심을 갖게 했고 동아시아의 역량에 대해 심층보도를 하게 만들었다. 한국은 그러한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중국으로부터 입국을 막지 않았던 한국은 주간의 짧은 기간 동안 갑작스러운 감염 증가와 감소를 경험했다. 반면에, 많은 유럽 국가들은 감염통제에 실패했고 무기력하게 엄청난 규모의 감염과 그로 인한 사망에 직면했다. 한국의 상대적인 방역성공은 짧은 시간 안에 가급적 많은 감염원과 접촉자들을 추적하는 역량 덕으로 여겨졌다. 또한 한국의 빠르고, 넓고, 효율적인 진단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서구 국가들은 그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제뉴스매체인 로이터는 자세하게 한국의 필요한 방역조치에 대해, 미국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대조시켜서 보고한 있다. 한국의 진단기구 생산과 수출능력은 세계적인 유명세가 되었는데, 많은 서구 국가들은 자체 수요를 만족시킬 공급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4]

한국은 엄청난 국제적인 관심을 받았는데,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도 대처했다. 대만은 감염통제를 한국보다도잘 했는데, 6.23 기준으로 감염자 수백 , 사망자 10 미만 수준이었던 반면에 당시 한국은 1 이상의 감염자와 3자리 수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같은 때에 중국은 10 미만의 감염자와 1 미만의 사망자를 기록했다. 당시 중국의 감염자수는 21번째였고 많은 서구 국가들이 그보다 많은 감염자를 기록했다.[5]

동아시아 국가들의 서구 국가들보다 나은 방역은 관심을 끌고 파고들게 만든다. 특히 판데믹이 가져다준 심각한 타격의 양측의 차이를 단지 우연 탓으로 치부하기에는 어렵게 만든다. 학습하는 인간에게 정도의 심각한 사건은 연구되어져야 하고 미래를 위한 기회로 활용되어져야 한다. 물론 통제된 실험을 없는 상황에서 차이들에 대한 과학적인 원인을 발견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리고 기존의 관념이나 선입견은 중립적인 견지에서 차이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므로 어쩔 없이 우리는 해석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해석은 과학적으로 탄탄하거나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실수 또는 틀린 이해일지라도 비판과 교정에 열려 있다면 이해의 발전에 기여할 있다. 또한 상황의 심각성은 초기단계의 이해의 부족함도 어느 정도는 감수하게 한다. 필자는 그러한 여러 어려움을 알고 있으면서도, 동양과 서양의 차이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는 우열을 가르기 위함이 아니고 상호 이해를 통해 세계에 기여하고자 한다. 필자는 다음 절에서 동양과 서양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으로 시야를 획득하고자 하며, 이어지는 들에서 현재의 관심사를 다루고자 한다.

2. 동양과 서양 관념의 역사적 기원


동과 서라는 방위 개념에 영토 개념을 부여한 것은 유럽적인 전통이다. 유럽에서 2(유럽과 아시아) 또는 3(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지리적인 대륙론 관념이 형성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이라는 3 대륙 관념을 만들어냈다. 반면에, 중동의 학자들은 '이슬람의 '-중동에서 시작해서 북아프리카, 스페인에 이르는- 세계의 중심으로 간주했다. 중동의 관념에서는 비잔틴제국, 북쪽 , 페르시아 넘은 동쪽은 약간이라도 열등한 곳들로 간주되었으며, 그외의 북쪽과 남쪽에 사는 사람들은, 백인이건, 흑인이건 야만인들도 간주되었다.[6] 중국도 스스로의 중심주의가 있었다. 중국인들은 문화중심지 '' 열등한 또는 야만적인 사람들이 사는 변방인 '' 세상을 구분했다.[7] 중동이나 중국이나 19세기 전에는 유럽에 그다지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다만 중동은 중국보다는 유럽에 가까와서 유럽과의 조우가 많았다. 이에 반해, 유럽은 항상 아시아를 의식했다. 사실 신화에서, 유럽의 어원인 유로파(Europa) 제우스에 의해 지금의 레바논인 포에니시아(Phoenicia)에서 크레타(Crete) 납치되었다. 기원전 9세기부터 5세기, 그리스인들은 지중해 주변을 식민지화하면서 아시아, 리비아(Libya, 아프리카의 의미) 명사로 자리잡았다. 기원전 500 즈음에 세계를 유럽과 아시아(리비아는 아시아의 일부로 간주) 나누는 유럽적인 이분법이 자리잡았다. 그리스인들에게는 2분법이 유효해보였는데, 유럽과 아시아, 서와 , 그리고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대립구도가 그러했으며 밀레투스(Miletus) 헥타에우스(Hecataeus) 그러한 입장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어서 헤로도토스(Herodotus) 자신도 심각한 고려없이 세계를 유럽, 아시아, 리비아(아프리카) 나누는 3분법 관념을 제시했고 자리잡게 했는데 이것이 이후 넓게 퍼진다.[8] 7세기에는 노아(Noah) 아들, 자페쓰(Japheth), (Shem), (Ham)이라는 기독교-유대교적 믿음은 인격화된 3대륙론을 낳게 된다. 유럽은 자페쓰, 비유대인(gentile), 그리스인들의 땅이며 번영이 예정되었다. 아시아는 유대인들, 선택된 자들, 그리고 예수의 땅으로 예언자의 땅으로 영광되지만, 오래된 법에 대해 충성하는 사람들의 땅으로 열등한 땅으로 간주되었다. 아프리카는 불행한 헴의 후손들의 땅으로 노아에 의해 자페쓰와 쉠의 하인들로 운명지워졌다.[9]

3
대륙 신화는 유럽이 세계를 서양과 동양으로 구분하는 이분법의 원천일 있다. 그런데, 유럽에 대한 관념은 유럽이 중동과 대치하면서 강화되었다. '유럽'이라는 관념은 7세기와 8세기 이슬람이 유럽으로 확장되면서 형성되었다.[10] 양쪽의 종교로 다름으로 인해서 기독교(Christianity) 또는 기독교세계(Christendom) 유럽의 정체성에 각인되었다. 기독교세계(Christendom) 처음에는 추상적인 개념이었지만, 그레고리 7(Gregory VII) 교황청이 기독교세계에 지리적 또는 영토적 개념을 부여하였고 이는 교황 어반 2(Urban II) 지위하의 1 십자군 원정(1096-1099) 그로부터 13세기까지 이어지는 십자군원정의 명분이 되었다.[11] 그러나 중세말인 14세기와 15세기에는 십자군원정의 에너지와 교황의 리더쉽은 약화되었다. 유럽은 아시아로부터 단절되었고 그리고 당시 중동의 초강국이었던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밀려나면서, 유럽은 기독교적 이상보다는 경제활동의 단위로 자리하게 된다.[12]

16
세기에 유럽은 내부에서 그리고 외부로부터 변화를 맞게 된다. 기독교체제는 민족적이고 세속적인 정부에게 밀려나는 한편, 아메리카 대륙와 항로의 발견 덕에 세계에 대한 유럽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1683 오스만 투르크가 비엔나 원정에 실패하면서 위축되자, 유럽은 동쪽으로 확장해갔다. 18세기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문명'(civilization)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고 ()유럽을 그러한 경우로 그리고 거의 유일한 경우로 간주하고[13]

중동(근동, Near East)이나 중국(Far East)같은 '동양'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나폴레옹의 군대가 이집트와 시리아로 원정을 했고, 1840-50년대에 영국은 아편전쟁에서 이기고 중국에 무역조건을 받아들이게 하면서, 원동과 근동은 각각 문명으로서의 자부심을 잃었다. 그러면서, 유럽적 지리학적 개념인 동양과 서양은 각각 우월과 열등의 함의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유럽의 확장에 수반된 노예무역과 식민화는 인종주의나 사회적 다위니즘(Darwinism) 같은 이데올로기나 선입견에 의해 정당화되기도 했으며 그러한 사고는 일정하게는 동양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합리주의자 또는 근대주의자의 이론은 동양과 서양 이분법에 맞춰지기도 했다. 막스(Karl Marx) 동양의 낙후성에 대해 식민주의를 지지했었던 바도 있고 다만 나중에 반식민주의로 입장을 바꿨었다.[14] 막스 웨버(Marx Weber) 캘비니스트적 프로테스탄티즘(Calvinist Protestantism) 유럽의 합리적 자본주의 대두의 주요 요인으로 한편 동양은(중국, 인도, 중동 모두) 자본주의의 미발달을 그러한 합리주의적 철학이나 세계관의 결핍에서 찾았다. 웨버는 동양에 대한 그의 지식이 부족함을 인정하면서[15] 그의 가설에 대해 조심스러워했지만,[16] 그의 이론은 경제적인 후진성을 문화결정론으로 연결하는데 활용되곤 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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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중엽 2 세계대전은 세계에 변화를 가져왔다. 식민주의는 포기되었고, 식민지와 국가들은 해방되었다.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를 열었다. 구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블록은 전방의 미국의 동맹국들에게는 미국의 후견하에서의 경제번영으로 이어졌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일본, 한국, 대만이 수혜를 받았다. 나중에는 구소련을 견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중국과 미국의 외교관계가 1970년대에 수립되었고 중국은 미국시장에 수출이 허용되기 시작했다.[18] 동아시아의 경제적 부상은 전통적인 문화결정론을 반대로 뒤집은 '아시아적 가치'(Asian Value) 이론으로 이어졌다. 극단적인 아시아적 가치론 싱가포르의 오랜 총통이었던 리콴유에게 비롯했는데, 그는 유교주의적 수직적 질서에 기반한 아시아적 가치는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보다도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효과적이라는 그의 믿음에 따라 가부장적인 방식으로 싱가포르를 이끌었다. 반면에,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고 대통령을 역임한 김대중은 리콰유를 비판했는데, 유교주의는 서구의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아니고 그것의 휴머니즘과 민주주의의 요소들을 공유한다고 봤다.[19]  아시아 지도자들의 논쟁은 아직 어느 쪽으로 결론지어졌다고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논쟁 자체가 동아시아에서의 건강한 긴장이 있음을 함의하며, 그것은 서구 사회에도 긍정적인 시사점을 있다. 필자는 다음 절에서 서구 사회에 구별되는 아시아 사회의 특징들을 짚어보고자 하며, 이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 있어서도 보다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도움될 것으로 본다.

3. 동아시아사회와 서구사회의 차이


그룹을 다른 그룹과의 내재적인 차이라는 점에서 구별하는 것은 항상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집단 IQ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차이라고 밝혀진 것들이 맥락이나 환경적 상황을 고려하지 못한데 따른 부정적한 연구에 따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그룹은 없기 때문에 차이로 밝혀진 것들이 시간변화에 따라 변화할 수가 있다. 막스 웨버가 목도했던 중국은 지금의 중국과는 다를 있다. 그래서 사회의 내재된 특성이 있다고 주장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목격하는 그룹간 차이가 편향된 인식 탓이라고만 하기도 어렵다. 그리고 그룹간 또는 문화간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그런 없다고 가정하거나 그런 것들을 무시하는 것보다 불필요한 마찰을 최소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설령 차이에 대한 인식이 틀린 것일지라도, 우리가 상호이해를 위해 차이를 구별하고 어떤 오해에 대해 수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적어도 차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그로부터 서로에게 유용한 함의를 얻고자 하는 것은 것은 타당하며 심지어 권고되는 바이다.

필자가 문헌을 검토한 바에 따르면 그룹이나 사회의 특징에 대한 학문적인 접근은, 서로 겹치는 면은 있지만 근대화론, 비교철학, 간문화 심리학의 3분야로 구분되는 듯하다.

먼저 근대화론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근대화론은 산업화를 사회정치적인 넓은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 발전되었다. 앞서 언급된 막스와 웨버는 근대화론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20] 막스에 관한한, 그의 관점이 물질적 수준이 사회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인과관계로서 경제결정론이라고 한다면 사회간 차이는 변화가능하니 그다지 많은 관심을 부여할 이유는 없다. 막스의 근대화론은 경제적 차이를 넘어서서 사회간 차이에 대해서는 그닥 많이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간 차이에 대한 유의미한 근대화론은 인과를 사회정치 또는 문화적 차이로부터 산업화나 경제발전에서의 차이를 보는 쪽이다. 웨버는 이쪽을 택했다. 웨버는 근대화에서의 간문화적(inter-cultural) 요인들을 연구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래로 근대화의 문화적 면에 대한 고려는 많이 있었지만 웨버는 문화와 근대화의 연관을 정식화하기 위한 밀도 있는 연구를 정초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웨버의 가설은 캘빈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은 합리적 자본주의의 기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캘빈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소명(voation/calling) 바치도록 하는 것인데 반면 가톨릭과 루터주의에서는 인간은 신을 담는 그릇(vessel)으로만 간주되었다. 그래서 캘비니즘은, 가톨릭이나 루터주의같은 신비주의 종교가 아니라 합리적 종교가 되어서 근대 자본주의의 등장을 도왔다. 반면에 유교주의는 일정하게 합리적이었지만 합리성이 가부장적 관료주의에 국한되었고 대중은 마법적인 세계관에 갇혔다.[21] 막스는 먼저 산업화된 사회가 산업화된 사회의 미래라는 문화수렴 가설을 제시했고 (Daniel Bell)이나 다른 근대주의자들이 대강 그런 방향을 취했지만 문화나 종교적 차이는 사회의 발전을 이해함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요인이었다. 헌팅턴(Samuel Huntington) 문명에서 문화적 차원을 강조한 것은 지정학적 사고에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이슬람권인 중동과 기독교권인 서구의 충돌과정을 배경으로 그러했다. 설문조사를 통한 경험연구 기반으로 문화적 차이를 연구한 잉글하트와 베이커(Inglehart and Bake, 2000)[22] 따르면, 경제발전은 어느 정도는 비슷한 세속적인 문화로 수렴되게 하지만, 경로는 선형적이지도 결정론이지도 않으며, 문화나 종교에 내재된 삶의 의미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다.

번째로, 비교철학은 주로 서양과 동양의 철학을 비교하는 철학이다. 동양의 철학은 중국과 인도의 철학인 면이 있다.[23]  분과는 20세기에 동양과 서양의 철학자들이 철학적 텍스트들을 소통하면서 공부하고 번역하는데서 비롯한다. 그런데 그러한 소통은 예수교수도회의 기여로 계몽주의시대에 이미 있었다. 체계화된 학문으로서 비교철학은 개의 다른 철학적 전통을 철학적인 준거에 의해 검토했고 공통성과 차이를 규명했다. 그래서 기준과 해석에 따라서, 한때 또는 학자가 제시한 공통점과 차이점은 다른 때에 또는 다른 철학자에 의해서 뒤집어지곤 한다. 그래서 공통의견에 안착하기보다는 계속된 주장과 반대주장이 분야를 특징 지우며, 이는 물론 학문분야에서 특이한 것도 아니고 분야의 건강성의 증거이기도 하다. 어떤 주장도 반대주장에 의해 뒤집히기도 하지만, 적어도 시작단계의 가설로서 다퉈지거나 또는 허용되는 주장들도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의 기준이기도 방법론, 인식론, 윤리학이라는 견지에서 동양철학, 특히 중국철학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서양철학과 다른 면이 있다. 중국철학은 방법론적으로는 기술(discursive)하는 편이며, 인식론적으로는 통합적(holistic)이며, 윤리적으로는 가족적 또는 관계적인 반면에 서양 철학은 논쟁적이고(argumentative), 분석적이고(analytic), 개별적이다(individualistic). 그리고 이러한 각자의 특징들은 특징들끼리 어울린다. 중국철학은 세상과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보며, 부분을 때에도 부분들이 서로 간에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시각은 부분적인 변칙적인 또는 심지어 반대되는 사고들은 간과된 너무 단순화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차별화는 적어도 이상형(ideal types)으로 역할하면서 추후의 시도있는 연구의 마중물일 있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 경험이나 관념에서 그러한 관점을 지지할 가능성이 크며, 나중의 사고의 발전(비판을 비롯해서) 적어도 유용할 것으로 것이다. 그래서 도식화의 가능성이나 위험성을 염두에 둔다면, 그러한 철학적인 차별성은 전적으로 해롭지는 않을 것이며 일정하게는 유용할 것이다.

번째. 간문화 심리학은, 앞서의 근대화론이나 비교철학과 아주 다르지는 않지만, 개인의 심리가 문화적 맥락에 의존한다는 가정하에 그것을 입증하기 위한 많은 심리학적 실험들을 정립해왔다. 문화적 그룹의 크기나 범위는 종족에서부터 문명 단위까지 다양하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문화단위일 수가 있는데 다만 단위가 커지면 안에서의 문화다양성이 커지는 것은 유념사항이다. 호프스테드(Hofstede) 문화차원에 따라 국가들을 유형화한 연구는(1980) 간문화 심리학을 정초했다고 여겨진다. 호프스테드는 문화를 (1) 권력위계성(power distance) (2) 불확실성 회피(uncertainty avoidance) 태도 (3) 개인주의-집단주의(individualism-collectivism) (4) 남성성-여성성(masculinity-femininity) 4가지 차원으로 구분했다.[24] 그리고 그는 다수 국가들에서 일하는 IBM 직원들의 감정이나 태도 데이터를 얻은 다음 그들의 국가들을 위의 4가지 차원에 따라 위치시켰다. 그의 가지 접근 방식은 직원들의 국가들을 위계 정도와 개인주의-집단주의 차원에서 위치시켜본 것이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개인주의와 낮은 위계성을 의미하는 아래 왼쪽 사분면에는 미국, 영국, 독일같은 서구 국가들이 위치하고, 집단주의와 위계성을 의미하는 반대편 사분면에는 동아시아 국가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3세계' 국가들이 위치되었다. 개인주의와 높은 위계성을 의미하는 아래 오른 사분면에는 프랑스나 벨기에같은 서구의 라틴 국가들이 위치되었었다.

호프스테드의 문화차원 중에서 개인주의-집단주의가 가장 많이 차용되었고 특히 동아시아인들과 유럽 기원의 미국인들을 비교하는 연구가 많았다. 호프스테드는 개인주의를의무보다 권리 우선, 자신과 직계가족 중심, 개인자율성과 개성실현 강조, 개인의 성취를 중심으로한 정체성 추구 정의했다. 두르켕(Durkeim) 기계적(mechanic) 사회 유기적(organic) 사회, 베버의 개인주의적 프로테스탄주의 집합적 가톨릭주의, 토니스의 게셀샤프트(Gesellschaft)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 등이 그러하다.[25] 서구 문명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의 가치관의 변화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대립은 근대화를 이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개념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동아시아를 이해함에 있어서 고민이, 동아시아는 집단주의 사회라고 여겨짐에도 동아시아가 근대화의 중요한 면인 산업화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민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은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함과 동시에 동아시아와의 대조를 통해 서양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였으며 이는 다음 절에 다루고자 한다.

4. 동양과 서양에 대한 되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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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 서양의 우위가 명백해졌을 , 방어적 또는 심지어 패배주의적 위치에 처한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어떻게 그것에 대응할 것인가 또는 이겨낼 것인가는 사활적인 이슈였다. 그런데 후에 동아시아가 경제개발에서 진전하면서 일부 동아시아인들은 서양에 대해 승리자의 위치를 의식하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서구의 학자들은 동아시아에 대한 이해를 깊이했고 서양과 동양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을 넘어섰고 일부 서구 학자들은 서구의 단점들을 보완하기 위해 동양적 가치들을 서구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1세기 이상에 걸쳐서 보여진 서양을 의식한 또는 서양과 관련지어본 동양에 대한 사고는 많이 변화해왔는데, 지금도 그러한 다양한 사고방식이 결론에 도달했다기보다는 넓은 스펙트럼에서 모두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에 대한 다양한 태도나 이해방식은 지금도 일정하게 역사적인 측면에서 조명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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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중에 서구의 지배력이 명백해졌을때까지, 동아시아는 중국의 헤게모니하에서 평화로왔거나 또는 적어도 안정적이었다. 아편전쟁은 중국으로 하여금 기술 특히 군사기술에서 뒤쳐져 있음을 깨닫게 했다. 중국은 서구를 경외하기 시작했고 위협당하는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사현대화를 위한 자강운동(運動) 추구해야 했다. 서구로부터의 충격은 일본에도 미쳤다. 일본의 막부는 1954년에 미국과 교역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으며, 이어 1867 메이지 유신을 받아들여야 했고, 급기야 1871 스스로 해체해야 했다. 한국, 당시 조선은 유사하게 1871년에 미국과 그리고 이어 1876년에 일본과 교역을 시작해야 했다. 중국과 조선이 그들의 전통 체제에 고착되어서 서구적인 국가체제의 면들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하거나 주저했던 반면에, 일본은 1890년에 아시아 최초로 비교적 쉽게 입헌군주제를 채택했고 곧이어 서구의 제국주의적 야심과 수단들을 체득했다. 조선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확장에 희생되어 1910년에 주권을 잃었고, 1945년까지 일본의 식민지로 존재해야 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되자마자 한국은 북한과 남한으로 분리되었으며 1948년까지 각각 소련과 미국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이어 국제화된 내전이면서 최초의 이념대결 국제전쟁이었던 한국전쟁에 직면한다. 중국공화국이 청을 끝내고 1911년에 등장했는데, 수년간의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과 나중에는 일본과의 전쟁(1937-1945) 휩싸였다. 아시아의 근대화의 독특성은 일본이 제국주의에서 서구의 역할을 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일본이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서구의 대리자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일본은 결국 2차대전에서, 당시나 지금이나 서구 초강대국인 미국에 졌고, 1952년까지 미국의 군사정부하에서 재구조화 또는 근대화를 해야 했다. 중국 쪽은, 공산당이 1948 국민당을 이겨 타이완으로 몰아냈다. 한국전쟁 중에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각각 동맹관계를 수립했고 미군이 자국의 영토에 주둔하게 하였다. 공산당 지배하에서의 중국이 소련과 동맹을 맺었다면, 국민당 지배하의 타이완은 미국과 그러했다. 1979 중국이 미국과의 수교를 하고 서구경제체제를 수용하면서, 중국은 미국의 후원하에 빠른 경제성장 궤도로 올라섰다. 19세기 중반 이후 세기보다 시간 동안 서양은 동아시아에 강한 충격을 남겼다. 동아시아는 서구의 탁월성을 인정했고, 서구의 면모들을 수용하기 위해 애썼다고 있으며, 물론 수용의 정도와 범위는 국가마다 달랐다. 그래서 세기도 시간 동안, 서양에 대한 부정적 또는 심지어 적대적 감정도 또한 있었지만 서구를 배우려고 했던 쪽은 동아시아였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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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후반은 일부 아시아 국가들이 성공적인 경제부상했고 그들의 수월성이나 강점에 대해 스스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일본은 독보적인 국가가 되었고 미국을 조만간 따라잡을 있는 약간의 차이로 추격했다. 싱가포르는 성공을 유교주의 전통이나 문화에 귀속시키면서 '아시아적 가치' 옹호한 반면에, 서구의 자유주의를 서구의 쇠락의 요인으로 비판했다.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처럼 성공적인 경제는 아니었지만 '아시아적 가치' 대한 유사한 자부심이나 이념적 경도를 보였다.[26]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가 서구의 기술로부터 그들을 고립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원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문화에 대한 포지션은 어느 정도는 백년 전의 서구문화에 대한 보수적인 또는 선택적인 입장의 재등장이었다. 서구의 정치나 철학은 거부하고 군사적 근대화를 추구했던 중국의 자강운동, 일본이 내세운 '화혼양재'(和魂洋才), 조선의 '동도서기'(東道西器) 등이 그것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구 기술뿐만 아니고 서구의 정치시스템도 받아들였지만, 문화와 철학에서 서구와는 구별하려는 경향도 혼재했다. 그런데 이러한 경향들에 동아시아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가중치를 주는 것도 동의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그러한 태도들은 국가적 단결 또는 심지어 독재를 위한 구실이나 이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이완이나 한국은 서구의 리버럴리즘을 정치적 목표 또는 근대화의 표준으로 간주했다. 타이완과 한국은 단지 경제개발에서뿐만 아니라 서구적 기준의 정치적 근대화에도 매우 성공적인 나라들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리더였고 대통령을 역임한 김대중은 리콴유가 아시아적 전통에서 자유주의를 배제하는 것을 비판했을뿐 아니라 유교주의와 서구의 리버럴리즘은 민주주의와 계몽주의를 지향하는 공통점이 있다고 지적한 바도 있다.

실제 시간에 걸쳐 많은 서양과 동양의 학자들은 아시아 문화, 특히 유교주의 전통을, 전제주의 지배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계몽주의 철학으로서 해석하려고 노력해왔다. 그리고 일부 서구 학자들은 유교주의 전통은 서구 시스템을 보완할 있는 철학 또는 윤리일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필자는 문헌연구를 통해서, 동양과 서양에 대한 공통점을 찾으려고 했거나 또는 양자에 대한 보다 나은 이해를 통해 시사점을 얻고자 3가지 사고 전통을 찾을 있었는데, 그것들은 발전국가 경제학, 중국학(synology) 포스트 유교주의, 공동체주의이다.

첫째, 발전국가 경제학. 찰머스 존슨(Chalmers Johnson) 1980년대에, 일본경제로부터 영감을 얻어서 국가 또는 정부관료의 적극적인 역할로 특징지워지는 '발전국가' 제시한 이후,[27] 발전국가 경제학은 상당히 인기있는 발달경제학의 세분야 또는 관점이 되었다.[28] 그런 주목은 갑자기 부각되었다고는 없고 실은 정부의 역할에 대한 오래된 대립구도가 다시 떠오른 것이라고 있다.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재무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터(Alexander Hamilton)으로 거슬러가는데, 그는 자유무역에 반대하면서 보호관세로 미국의 산업을 보호하고자 했다. 프리드리히 리스트(Friedrich List) 그러한 개입주의와 보호주의를 독일로 들여와서, 당시 영국에 비해 뒤쳐졌던 독일의 '유치'('infant')산업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일본은 서구를 추격하기 위해 독일의 보호주의를 받아들였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과 한국은 역시 일본의 경제모델을 들여왔고 나중에 중국도 일본, 타이완, 한국과 유사하게 정부개입모델을 채택했다.[29] 타이완과 한국이 발전국가모델의 전형이지만 다른 중국을 비롯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특징을 어느 정도 공유했다. 신자유주의는 선진국들에서는 1980년대에 케인즈적 개입주의를 무력화시켰지만 발전국가 경제학은 개발도상국들로부터는 관심을 받았다. 그리고 정부의 역할에 관심이 많은 경제학자와 정책가들은 발전국가모델을 지지했고, 신자유주에 기반하고 저성장과 빈부격차를 야기했다고 주장되는 워싱턴 컨센서스(Washington Consensus) 대한 대안으로 그것을 지지했다.[30] 양쪽의 대립구도는 계속되었지만, 2008-9 금융위기가 서구 국가들에 타격을 가한 , 서구 국가들은 국제적인 이익보다는 국가적인 이익에 경도되었다. 극적인 경우가 2016 영국이 EU 탈퇴하는 국민투표와 그에 따른 그러한 의사결정이었다. 트럼프가 2016 대통령 선거에서 이긴 미국은 중국에 대해 강한 압박을 취했다. 중국의 국가주의가 불공정한 무역과 투자를 야기했다는 불만을 제기한 미국은 양국 사이의 소위 무역전쟁을 제기했다.[31] 양국의 간극은 코로나 국면에서 벌어져서, 미국은 중국기업의 미국 반도체 기술 사용을 금지하게 정도로 양국 간의 기술 단절을 시도할 정도에 이르렀다.

둘째, 중국학은 예수회 수도사들이 중국에 방문했고 어떤 이들은 평생을 그곳에서 살기 시작했던 16세기 이래 유럽에서의 학문적 전통이었다. 예수회 수도사들은 유럽의 예술작품, 천문기구와 천문지식을 중국에 들였고 반대로 사서와 같은 중국의 고전문헌과 자기와 같은 공예품을 유럽에 가지고 왔다. 그들은 또한 관료제나 과거시험같은 중국의 제도들을 유럽에 소개했다. 중국의 통치는 유럽의 군주지배체제하의 계몽주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 "계몽된 군주주의' 간주되었다.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인 볼테어(Voltarire), 몽테스키외(Montesquieu), 케네(Quenays) 등은 과거시험같은 중국의 일부 제도를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아담 스미스(Adam Smith) 도덕철학도 케네를 경유하여 중국학에 영향받았다. 박학다식한 독일의 천재 라이프니츠는 주역에서 힌트를 얻어서 이진법을 제시한 있으며, 그런 것처럼 그는 세계가 중국과 유럽의 전통이 종합으로부터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국에 대한 그와 같은 관심은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약해졌다. 왜냐면, 이후에 유럽 사람들은 공화국이 관심사였을 , 군주국에 대해서는 아니였기 때문이다. 또한 유럽은 빠르게 산업화가 되었던 반면에 중국은 퇴행적이었고 개혁의 에너지도 결여했다.[32] 유럽은 제국주의 또는 식민주의적인 팽창을 했고 결국 중국은 서구의 무력에 무릎 꿇었다. 충격에 쌓인 중국의 지식인들은 중국적 전통을 비난하기 시작했고 유럽을 모델로 중국을 근대화시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즈음 막스 웨버가 유교가 중국에서 합리적 자본주의가 등장하지 않은 요인이라고 가설을 제기했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중국본토에 수립된 이후, 중국 유교학자들은 서구에서 서구 철학을 공부했고, 근대화와 같은 폭넓은 주제들로 연구를 확장했다. 1980년대엔 포스트 유교주의라는 새로운 유교주의 재해석 흐름이 등장했다. 시기는 일본과 아시아 4룡과 같은 아시아 경제들이 대단한 성공을 거둔 때이기도 하다. 웨버의 가설에 대항해서 포스트 유교주의자들은 유교주의가 근대화의 윤리관으로서 도움이 되지 방해물은 아니다라는 견해를 펼쳤다. 버거(Berger) 아시아 근대화는 '세속적 유교주의'(vulgar Confucianism) 도움되었는데 그것은 유교주의 문화권에서는 친숙한세상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 훈육과 자기 계발이 지속되는 삶의 양식, 권위에 대한 존중, 검약성, 가족의 안정적 삶에 대한 천착등이다.[33] 유교주의 개혁가들은 유교주의를 근대사회에 맞게 해석했고 유교주의적 인문주의(humanism)으로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위험성도 존재한다. '아시아적 가치' 지지자인 리콴유와 마하티르(Mahathir) 유교주의를 권위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용했고 서구는 자유주의의 실패라고 폄하하였다. 이와 같은 승부적 관점의 유교주의적 해석은 서구의 타자를 적대화하여 오리엔탈리즘을 뒤집은('reversed orientalism') 것이라고 있다.[34] 그리고 반대로, 여전히 유교주의의 위계성, 남성중심, 집단주의에 대한 비판도 존재한다. 이러한 비판은 전통적인 아시아 국가들의 근대화 실패에 기인하지만, 여전히 유교주의에 대한 사회적 반감의 원천이기도 하다. 유교주의가 부정적 적대감에서 우월주의적 지지라는 넓은 스펙트럼에 걸친다는 것은, 동시에 그에 대한 균형적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조건이기도 하다.

셋째, 공동체주의. 공동체주의 오래된 사고이지만 현대의 공동체주의는 롤스(Rawls) 그의 저서 '정의론'(A Theory of Justice)에서 피력한 자유주의적 정의론에 대한 대응에서 비롯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에 기대서, Alasdair MacIntyre, Michael Sandel, Charles Taylor and Michael Walzer 롤스의 정의론을 반박하면서 현대의 공동체주의 담론 이끌었다. 그런데 동아시아 문화 모델이 서구에 견줄만한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고, 서구의 것과는 차이가 있더라도 서구의 자유주의제도를 차용한 정치시스템을 정착시면서 공동체주의 사회의 실례가 되었다. 공동체주의자는 서구의 자유주의가 원자화된 개인주의(atomistic individualism) 기반함으로써 사회적 (good)이나 관계를 소홀하게 여긴다고 비판하다. 이에 반해 유교주의에 기반한 동아시아 사회적 관계 속에 정의되는 '자아'라는 관점을 제기한다고 여겨진다.[35] Robert Putnam, Benjamin Barber, Amatai Etzioni, David Mathews 서구의 공동체주의 사상가들은 법규제(lawmaking) 의존하되, 사회적인 상호이해와 컨센서스 형성이라는 유교주의에 부합하는 사회적 규범을 만들어갈 것을 제안한다.[36] 동아시아에서 유교주의에 기반한 공동체주의가, 앞서 리콴유와 마하티르의 경우에서 보이듯이 자유주의 가치에 반대하면서 가부장적이거나 권위주의적인 정치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활용될 수도 있지만, 유교주의 문화권인 일본, 한국, 타이완과 같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 정체를 만들어낸 것을 유교주의적 공동체주의는 많은 논의를 위해 주목받을 자격이 있다고 있다.

4. 결론


코비드-19 단지 공중의 건강과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뿐만 아니라 사회를 깊이 들여다보게 한다는 점에서도 영향이 크다. 코비드-19 의해 영향받지 않은 면이 없기 때문에 사회는 확연히 들여다보인다. 정부가 기존의 방역대책과 실제 작동 사이의 차이를 메꾸는 능력, 피해받는 사람들에 대한 경제적 조처들, 사람들이 전염병과 더불어 정부의 조처들에 대해 보여주는 반응, 변화된 환경과 새로운 기회들에 대한 사람들의 적응 , 우리는 다양한 사회적 반응과 상호작용을 목격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바들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해서 단순화된 결론으로 담아지기에는 어렵고 전염병과 그에 대한 반응이 여전히 진행중이서, 과도기적인 교훈을 얻는 것도 아직은 너무 이를 것이다. 물론 판데믹과 충격파를 이해하는 데는 향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부족한 지식과 정보 또는 심지어 오류성 있는 가정과 가설하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판데믹의 와중이고 부정적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가설적인 또는 아직 만들어진 과정의 생각들도 도움이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상의 논의에 기반해서 결론적일 수는 없지만 기여할 있는 또는 잠정적인 아이디어 또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첫째, 필자는 적어도 이상형(ideal type) 있어서 동양과 서양에는 차이점들이 있고 차이가 판데믹에 대처함에 있어서 차이를 가져왔다고 본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필자는 동양이 더욱 공동체주의적이거나 집합적이고 서양은 개인주의적이라고 본다. 그리고 전쟁과 같은 판데믹 상황은 공동체주의적 또는 집합적인 동양에 유리했다. 코로나19 사회 전체를 공격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사회 전체가 단결된 그리고 조율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강제된 거리두기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거리두기와 마스크 쓰기도 함께 가장 효과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거리두기와 마스크쓰기의 불편함과 부정적인 경제파급을 감수할 수록, 감염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며 심지어는 결국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함에도 좋다. 감염의 집합적 성격이 동양에서 일반적인 공동체주의나 집합주의의 장점을 부각시켰다. 근대사회가 자유주의나 개인주의에 기반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공동체주의나 집합주의에 부정적 관념을 갖을 있다. 그러나 사회는 개인들의 합은 아니며 개인들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체 사회가 먼저 안전해야 한다. 이는 새로운 발견일 수는 없으며, 동양이건 서양이건 이타주의로 높게 평가된 가치인데 다만 간과되었다가 판데믹에 의해 재발견되었다고 있다.

둘째, 자유주의는 판데믹에서의 그것의 역할에 대한 재조명을 받았다. 우리는 비록 방역에 효과적이라고 해도 권위주의적인 강제가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이 개인들에게 행사되는 것을 목도했다. 중국과 일부 동유럽 국가들에서 그러한 편향이 나타났다. 중국 우한의 봉쇄는 극한적인 것으로서 도시는 외부로부터 철저하게 봉쇄되었다. 시민들은 다만 외부로부터 봉쇄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시 안에서의 움직임도 극도로 통제되었다. 아파서 외부 병원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봉쇄 전에도 판데믹을 발견하고 정부에 보고한 의사들도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혐의로 처별 받았다. 그와 같은 발언에 대한 억압은 감염병의 확산을 막는데 부정적이었고, 결국 그와 같은 가혹한 봉쇄로 이어졌다. 만일 중국이 전염병에 대한 초기의 경고를 존중했다면, 상황은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달라졌을 있다.

중국이 극단적인 버전의 집합주의로서 세계에 상흔을 남겼다면, 타이완과 한국은 개인들과 자유주의와 조화를 이룬 공동체주의 또는 집합주의라고 있다. 타이완과 한국 역시 사람들의 행동이나 이동에 일정한 제약을 있고 감염된 사람의 경로를 추적하여 접촉에 의해 잠재적인 감염자들의 집합을 찾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개인들의 권리와 공중 보건의 절충이었고 결국 가급적 많은 개인들이 감염으로부터 안전하게 조처였다. 그러한 균형으로 인해서 방역을 하면서도 타이완인들과 한국인들은 가급적 최대한 일상의 삶을 유지할 있었고 경제도 그러했다. 타이완과 한국의 방식은 많은 서구 국가들과 대조적이다. 코로나의 급속한 확산의 와중에서 미국과 여러 유럽 국가들은 타이완이나 한국보다도 훨씬 심각한 봉쇄를 해야 했다. 일반적으로 서양 국가들이 동양 국가들보다 자유주의적이기는 하겠지만, 판데믹에 대한 대처의 실패는 서구 국가들을 불가피하게 개인자유를 억압하게끔 하였고 그래서 타이완이나 한국보다 자유롭게 만들었다.

셋째, 자유주의(liberalism) 내재된 공동체 가치(communitarianism) 재발견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 단지 이기주의로 여겨져서는 된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의지에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하지만, 다만 의지가 남에게 해를 미치지 않는 조건에서만 그러하다. 자신의 의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남의 그것도 그렇게 여겨야 한다. 그래서 자유주의에는 공동체나 사회에 대한 개념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군주제가 무너지고 자유주의 사회가 세워지자 자유주의는 정부에 대한 관점을 놓고 분화했는데, 사회적인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로의 분화이다. 후자는 개인주의적 자유를 정부 위에 두지만, 전자는 정부를 사회적 결집과 안전을 위한 집합적 의지로 간주한다. 이는 지금의 코로나 방역 관련된 대립도 이에 연유한다. 어떤 사회는 방역통제를 위하 최선을 이끌기 위해 정부에 많은 재량권을 부여하지만 다른 사회는 정부의 방역노력을 개인에 대한 과도한 통제로 간주한다. 정부가 감염된 사람들의 접촉을 추적하면, 사람들이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일정하게 양보하는 것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그러한 방역은 모든 사람들의 안전을 도우며 그래서 자유주의를 위배하지 않은데 자유주의는 로크의 인용에서처럼 남들의 생명, 건강, 자유, 또는 재산을 해치지 않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동체주의는 자유주의에 반대되는 아니고 실은 자유주의에 내재되어 있다. 그래서 선제적 방역에 굳건한 입장 자체는 자유주의에 반대되지는 않는다. 동아시가 국가들은 전통적인 집합주의나 공동체주의 덕에 선제적 방역에 있어 강한 컨센서스를 보다 쉽게 형성할 있으나, 독일, 뉴질랜드, 호주, 이탈리아 등의 서구 국가 역시 유사한 입장을 취할 있었다(이탈리아는 그와 같은 입장을 1 파동 때의 심각한 손실 후에 취했다). 자유주의의 원래 정신을 존중하는 선제적 방역에 대한 컨센서스를 형성할 있다. 다만 개인주의적(laissez-faire) 자유주의가 강한 사회들만이 선제적 방역에 대해 소극적인 면이 있다.

개인주의적 자유주의는 강점이 있으나, 항상 적절했다고는 없으며 그래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개입에 의해 수정되어 왔다. 19세기 아이들을 포함한 노동자를 착취했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경제는 노동법의 등장에 의해 비로소 규제되었다. 20세기 전환기의 독점자본은 반독점법의 등장에 의해 규제되었다. 1930년대의 공황은 확장정책을 주저하지 않은 케인즈주의적 정부에 의해 해결되었다. 2 대전 이후에는 실업과 같은 불행을 사회적인 문제로 규정한 복지국가의 개념이 등장했다. 198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개인주의적 자유주의가 횡행했었는데, 결국 2008-9 금융위기로 귀결되었고 케인즈주의적 개입을 불렀다. 이제 코로나19 치명적일수록, 사회적 또는 공동체적(social or communitarian) 가치가 재평가된다. 개인은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와지는데, 다만 사회, 개별 국가가 아니라 세계 전체가 코로나로부터 자유로와질 때만 그러하다. 이것은 심각한 위협이지만 기회이기도 하다. 세계는 결집해서 해법을 궁리하고 도달해왔다. 코로나19 극복되면, 세계는 단지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는 아니고 새로운 지평 위로 올라설 것이다.


(*)
글은 <인텔리전스 코리아> 1(2020, 여름/겨울 통합본) 수록되어 있으며, 글의 영문본은 intelligencekor.com/periodical/article.html?bno=15.

 

 


[1] BBC, March 20, 2020, “Special Report: How Korea trounced U.S. in race to test people for coronavirus“, www.bbc.com/news/world-asia-51836898.

[2] 
영어번역의 출처는 Korea Webzine, April 21, 2020, “Gov't rebuts French lawyer critical of Korea's COVID-19 response”. 웹진은 한국의 문화체육관광부의 공식 뉴스 포탈이다. 인용문에서 삽입 [ ] 필자가 제공한 바이다www.korea.net/NewsFocus/Society/view?articleId=184727.

[3] The Guardian, April 20, 2020, 'Coronavirus: who will be winners and losers in new world order? Are state responses to the virus shifting the balance of power between China and the west? by Patrick Wintour, Diplomatic editor, www.theguardian.com/world/2020/apr/11/coronavirus-who-will-be-winners-and-losers-in-new-world-order.

[4] 
로이터의 2020.3.19. 기사는 한국의 질병관리본부와 진단기 기업들이 긴밀하게 협력하게 신속하게 진단기를 공급하게 되는 과정을 소개한다. 'Special Report: How Korea trounced U.S. in race to test people for coronavirus', www.reuters.com/article/us-health-coronavirus-testing-specialrep/special-report-how-korea-trounced-u-s-in-race-to-test-people-for-coronavirus-idUSKBN2153BW

[5] 
월드오미터(Worldometers) 웹사이트는 전세계의 코로나 감염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왔고 널리 인용된다www.worldometers.info/coronavirus.

[6] 
이슬람의 세계관에 대한 인용 출처는 Bernard Lewis, 2001, The Muslim Discovery of Europe, W.W. Norton and Company: London and New York, p. 75.

[7] 
중국인들의 세계관에 대한 인용 출처는 Nicola Di Cosmo, 2002, Ancient China and its Enemies: The Rise of Nomadic Power in East Asian Histo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p. 93. Di Cosmo 따르면 중국과 주변에 대한 관념은 춘추시대 전인 () 왕조에서 형성되었다.

[8] 
그리스인들의 세계관에 대한 인용 출처는 Denys Hay, 1968, Europe: the Emergence of an Idea, Edinburgh University Press, with the first edition in 1957. pp. 2-3.

[9] 
기독교-유대주의적 세계관에 대한 인용 출처는 Denys Hay, op. cit., p. 14-15. Hay 따르면, 성경 창세기의 "God shall enlarge Japheth and he shall dwell in the tents of Shem, and Canaan shall be his servant."("신은 자페쓰를 크게 것이고, 쉠의 텐트에 묵을 것이며, 가나안은 하인이 것이다", Canaan, 가나안, Ham 후손들) 등의 구절들이 기독교-유대주의적인 3대륙관으로 이어졌다고 보고 있다.

[10] 632
마호멧이 죽은 이후 아랍은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북아르피카 지중해 연안으로 확장했고, 8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에 대면했고, 스페인을 정복했으며 남프랑스까지 진출했다. 아랍의 이러한 확장은 유럽의 영토와 조교 정체성을 자극했다. 샤를 대제가 732 투르에서 아랍을 패배시켰을 , 그는 로마-갈릭 그리고 '야만인들' 연합군을 '유럽인들'이라고 불렀다. 출처는 Hay, op. cit., pp. 24-25.

[11] 
출처: Hay, op. cit., p. 29.

[12] 
출처: Hay, op. cit., p. 72.

[13] Wolff(1994)
18세기 신조어인 '문명'(civilization) 계몽주의철학자들의 지적 중심으로서의 ()유럽과 그리고 동유럽을 비롯해 뒤떨어진 여타 지역에 대한 관념의 유래를 설명한다. Larry Wolff, 1994, Inventing Eastern Europe: the Map of Civilization on the Mind of the Enlightenment, Stanford University Press, pp. 4, 12-13,

[14] 
막스와 엥겔스가 공사당선언(1948) 썼던 시기와 인도와 중국에 대한 기사를 썼던 1853 즈음에 그들이 인종, 식민주의, 비서구사회에 대해 문헌들을 리뷰한 Anderson(2010) 따르면, 당시 막스는 자본주의나 식민주의가 전통사회의 후진성을 파괴하는 역할에 주목했다. 그러나 나중에 1857-59 즈음에는 막스는 자본주의의 긍정적인 영향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났으며, 유럽중심주의에 부합한 유럽적인 일의적인 선형발전 모델에서 다중발전모델쪽으로 전환했다. Kevin B. Anderson, 2010, Marx at the Margins: On Nationalism, Ethnicity, and Non-Western Societies,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p. 34-36.

[15] 
웨버는 그의 대표작 '프로테스탄드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에서 그는 중국을 비전문가로서 연구했고 그의 독서를 위한 번역물도 제한적이었음을 밝혔다. Max Weber (1958),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translated by Talcott Parsons (in the 1930 edition) and forwarded by R. H. Tawney, New York: Charles Scribner's Sons, p. 28.

[16] Schmidt(2011)
막스가 유교주의사회의 합리성에 주목하면서 유교주의 사회의 근대화가 힌두나 가톨릭 사회의 그것보다 가능성있다고 봤고 웨버는 문화라는 요소가 아니라 근대화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을 했다고 주장한다. Volker H. Schmidt, “Max Weber in Light of East Asian Development”, Max Weber Studies, January 2011, 11(1):13, 13-34.

[17] Zurndorfer(2018)
따르면, 웨버를 미국에서 번역하고 도입한 하버드대학 동료 사회학자 Parsons 영향을 많이 받았던 Fairbank 중국의 후진성을 유교의 정적인 문화와 연결지었으며 유교주의를 문화결정적 해석을 하도록 이끌었다. Harriet T. Zurndorfer, 2011, “Confusing Capitalism with Confucianism: Culture as Impediment And/Or Stimulus to Chinese Economic Development”, entry date as 2018/05/21, at Researchgate. www.researchgate.net/publication/325270473_Confusing_Capitalism_with_Confucianism_Culture_as_Impediment_AndOr_Stimulus_to_Chinese_Economic_Development

[18] 
미국은 중국에 최혜국(MFN, most favored nations) 1980년에 부여했는데 최혜국 대우는 비시장 경제 국가에 제공하는 것으로 해년마다 갱신되어야 했고, 그리고 미국은 1980년데 중국에 PNTR(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 지위를 2000년에 부여했는데 이는 갱신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의 2001 WTO 가입으로 중국은 국제사회와 보편적 무역관계를 수립한다. Wong (2010) 미국과 중국의 무역관계는 냉전시대에 소련을 고립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발전되었다고 주장한다. 출처: Dong Wang, 2010, “China's Trade Relations with the United States in Perspective&rdquo, Journal of Current Chinese Affairs, Volume: 39 issue: 3, page(s): 165-210

[19] 
리콴유와 김대중 사이의 토론은 우연히 Foreign Affairs 저널에서 이뤄진 셈이었다. 저널은 리콴유에 대한 인터뷰 기사를 실었는데 거기서 리콴유는역오리엔탈리즘’(reversed orientalism’-[34] 대응하는 본문을 참고)적인 그의 시각을 드러냈다. 출처: Fareed Zakaria, 1994, “A Conversation with Lee Kuan Yew”, Foreign Affairs. March/April 1994. 이에 대해 당시는 한국의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리콴유를 비판하는 글을 같은 저널에 기고했다. 출처: Kim Dae Jung, 1994, “Is Culture Destiny? The Myth of Asia's Anti-Democratic Values” Foreign Affairs, November/December 1994.

[20] Inglehart and Baker(2000)
간략하게 막스와 베버를 필두로 하는 대립하는 근대이론 진영을 소개한다. 출처: Ronald Inglehart and Wayne Baker, 2000, “Modernization, Cultural Change and Persistence of Traditional Value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65(1):19-51, February.

[21] Kolchi Shinohara, 1986, ““ Adjustment” and “Tension” in Max Weber's Interpretation of Confucianism,” Comparative Civilizations Review, Vol. 15 : No. 15 , Article 4. Available at: scholarsarchive.byu.edu/ccr/vol15/iss15/4.

[22] Inglehart and Baker, op. cit.

[23] 
비교철학에 대한 저자의 소개는 다음의 문헌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The entry of “Comparative Philosophy: Chinese and Western” from the web-based online publicati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ritten by David Wong. First published Tue Jul 31, 2001; substantive revision Tue Aug 4, 2020. Available at: plato.stanford.edu/entries/comparphil-chiwes

[24] Hofstede(1980)
대한 간단한 소개는 Berry et al.(2002, pp. 64-5) 의존하고 있다. 해당 문헌: John W. Berry, Ype H. Poortings, Marshall H. Segall, Pierre R. Dasen, 2002, Cross-Cultural Psychology: Research and Applicatio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Hofstede(1980) 문헌은 다음과 같다. Geert Hofstede, 1980, Culture’s consequences: International differences in work related values. Beverly Hills, CA: Sage.

[25]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에 대한 사회학적 논의 소개는 다음 문헌에 의존하고 있다. Daphna Oyserman, Heather M. Coon, and Markus Kemmelmeier, 2002, “Rethinking Individualism and Collectivism: Evaluation of Theoretical Assumptions and Meta-Analyses”, Psychological Bulletin, 2002, Vol. 128, No. 1, 3–72.

[26] Lee Kuan Yew
Mahathir 반자유주의, 반서구주의 입장은 다음 문헌에 제시되어 있다. Jana S. RoŠker, 2016, “Modern Confucianism and the Concept of “Asian Values””, Asian Studies, IV (XX), 1 (2016), pp. 153–164.

[27] Chalmers Johnson
자신의 개발국가 이론에 대한 서술은 다음에 요약되어 있다. Chalmers Johnson, 1999, “The Developmental State: Odyssey of a ConceptMeredith Woo-Cumings”, in Meredith Woo-Cumings ed., The Developmental State, Cornell University Press.

[28] Wade(2018)
동아시아 경제개발모델에 대한 경제학자와 정책연구소들의 관심을 언급하고 있다. 출처: Robert H. Wade, 2018, “Escaping the periphery: The East Asian ‘mystery’ solved”, WIDER Working Paper 2018/101, The United Nations University World Institute for Development Economics Research, prepared for 'Asian Transformations: An Inquiry into the Development of Nations'.

[29] Fallows(1995/1994)
동아시아 경제개발을 자유주의 경제학과 정부개입주의 시가의 대립구도하에서 보여주고 있다. 출처Looking at the Sun: the Rise of the New East Asian Economic and Political System; Hamilton List 등의 주장에 대해서는 Chapter 4 “The idea of Economic Success” 아시아의 경제개발역사에 대해서는 Chapter 8 “Contenders”.

[30] Wade(1996)
1980년대에 케인즈주의의 쇠퇴와 Washington Consensus 부상을 요약하고 있으며 동아시아 모델은 워싱턴 컨센서스 입장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고 평한다. 출처: Wade, Robert, 1996, “Japan, the World Bank, and the art of paradigm maintenance: The East Asian miracle in political perspective”, New Left Review, I: 217–50.

[31] Reihan Salam (President of the Manhattan Institute)
미국의 대중국 무역정책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며 그러한 무역정책이 중국의 권력자들을 살고 힘있게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출처: Reihan Salam, “ Normalizing Trade Relations With China Was a Mistake”, The Atlantic, June, 2018, www.theatlantic.com/ideas/archive/2018/06/normalizing-trade-relations-with-china-was-a-mistake/562403

[32] 
유럽의 ()중국학 학자들인 볼테어(Voltaire), 라이프니쯔Leibniz), 퀘네(Quesnay) 대해서는 Mungello (2013) 기반한다. Mungello ()중국학의 유럽에서의 성쇠를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데, 그의 저서 Chapter 4. European Acceptance of Chinese Culture and Confucianism and Chapter 5. European Rejection of Chinese Culture and Confucianism에서 그러하다. Mungello로에 따르면 퀘네는 '유럽의 공자'로도 불렸다(location 2661, Amazon Kindle version). Davis (1983) 유사하게 유럽에서의 중국학의 성쇠를 다루고 있는데, 특히 ()중국학 연구자들이 Adam Smith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Davis 따르면, Lewis A. Maverick (1946) 인용하면서, Adam Smith 저서 Moral Philosophy 프랑스 친중국학 연구자 Jean Baptiste DuHalde 번역한 '맹자' 축약본에 영향받았다고 한다. 또한 Davis (1983) 따르면, 역시 Maverick (1946) 인용하면서, 정부가 공업과 상업에 개입하는 것을 비판하는 자유주의(laissez faire) 경제학은 중국의 농업경제를 모델로 케네의 경제학에 영향받은 Smith 제시했다고 보고 있다.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D. E. Mungello, 2013, The Great Encounter of China and the West, 1500–1800 (Critical Issues in World and International History), 4th Edition, Kindle Edition,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Walter W. Davis (1983), “China, the Confucian Ideal, and the European Age of Enlightenment”, Journal of the History of Ideas, Vol. 44, No. 4 (Oct. - Dec., 1983), pp. 523-548; Lewis A. Maverick (1946), China a Model for Europe, San Antonio, Texas: Paul Anderson Company, 25.

[33] Jochim(1992)
20세기의 유교주의에 대한 학자들의 태도 변화를 소개하는데 그중 명이 Berger(1988)이다. 출처: (1) Christian Jochim (1992), ”Confucius and Capitalism: Views of Confucianism in Works on Confucian Ethics and Economic Development”, Journal of Chinese Religions, (1992): 135-171.; (2) Berger, Peter (1988). "An East Asian Development Model?" in P. Berger and M. H. Hsiao, eds., &ldauo;In Search of an East Asian Development Model”, New Brunswick, N.J.:Transaction Pubi., 1988, pp. 3-11.

[34] RoŠker(op. cit.)
아시아적 가치가 아시아사회에 대한 이상화된 '사회적 구성'으로 유교주의에 반드시 기반하는 것도 아니며, 비자유주의적인 정치체제를 옹호하기 위해서 특히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중국에서 채택된 면이 있어서 서구의 orientalism 아시아에서 반대로 활용된(reversed orientalism) 있음을 비판하고 있다.

[35] 
필자의 공동체주의와 동아시아에 대한 소개는 다음 문헌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Entry of 'communitarianism' from the web-based online publicati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written by Daniel Bell, first published Thu Oct 4, 2001; substantive revision Fri May 15, 2020. Available at: plato.stanford.edu/entries/communitarianism.

[36] H. George Frederickson, 1999, “Confucius and the Moral Basis of Bureaucracy”, Administration & & Society, Vol. 33 No. 4, January 2002, 61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