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9.9)
김환기 다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유병석의 시의 제목을 김환기가 에세이 제목에 채용한 것입니다. 이 제목은 다시, 환기미술관이 펴낸 김환기의 사후 에세이집(2005년)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다큐에서는 이게 김환기의 그림의 제목이기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다큐를 보면서 비로소 김환기에 대해 제가 품은 미스테리가 해소되었습니다. 저는 김환기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습니다. 다만 그의 추상미술 작품들만을 접한 것이죠. 제가 미술작품들을 자주 보지만, 개인의 생애나 작품세계에 대한 글까지는 읽지는 않거든요. 그렇기도 하고 아마 제가 굳이 김환기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특별히 그의 미술에 대해 관심이 높지 않았더 면도 있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이게 미스테리였어요. 저는 그렇게 마음이 확 끌리지 않는데, 왜 한국미술계에서는 김환기를 그렇게 높게 평가하고 또 그의 작품들이 박물관의 중요 전시품목이 되냐는 것이었죠. 그렇다고 제가 심도있게 미스테리를 해소할려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막연한 궁금증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죠.
다큐에서의 김환기는 굉장히 순수미술을 지향한 탁월한 예술이더군요. 요 대목만으로 미스테리가 해소된 거죠. 저는 "순수"라는 단어가 과연 순수한지 항상 의심을 품는 편이거든요. 저는 예술은 시대정신을 관통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굳이 순수한지 안하는지는 관심사항이 아니죠. 그리고 이 점에서 저의 나름대로의 유치한 수준에서의 예술관이 피력되는 것이겠죠. "보편적인 미"라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니까요. 이런 저에게 순수미술을 지향한 김환기의 작품이 그렇게 썩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은 당연한 것이겠죠. 이 점을 확인하고 새삼 기뻣습니다. 어리숙하나마 저의 예술관도 나름 일관성이 있는 것 같아서요.
김환기는 50년대-60년대 초반에 파리로 갑니다 (이 대목 근처에서부터 다큐를 봤어요). 세계에서 자신의 미술의 위치(또는 수준)를 확인하고 싶어했구요. 그때 오히려 한국의 미가 자신의 정체성임을 자각하고 한국의 형상들을 주요한 소재로 삼습니다. 달항아리, 십장생 같은 대상들이 자주 등장하죠. 독특한 한국적인 그의 미술세계에 대해 파리의 반응도 괜챦았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대성공을 거둔 것까지는 아니구요. 그리고 귀국해서 홍익대에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구요. 정원내로 학생들을 뽑으면서까지 집중적인 교육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인품과 미술에 대한 헌신성은 귀감이었던 모양입니다. 그의 제자들이 그를 참 좋아했구요. 그러다가 1970년즈음에 뉴욕으로 갑니다. 그 동기는 파리에 갈 때랑 비슷했구요. 이때 상당한 충격을 경험합니다. 팝아트가 뉴욕을 휩쓸었던 것이구요. 만화 같은게 예술이었으니까요. 팝아트 같은 것은 애당초 그의 체질에 맞지 않았을 것이구요. 그는 그의 미술을 좀더 추상화합니다. 수평선에 점들 몇 개 찍힌 것 같은 추상화들이죠. 그런데 평은 냉담했습니다. 아시아적인 특징이 없는 다만 서구의 추상주의의 제자 정도라는 평을 받았고 그림은 팔리지 않았구요. 이때는 생계도 팍팍했습니다. 그러던 중, 점을 극대화한 추상미술을 시도합니다. 화판 전체를 점들도 채운 거죠. 이때의 작품은 마치 우주의 소리를 이미지화한 것 같은 느낌을 주었고, 그래서 그러한 동양적 사색 같은 것을 이미지화한 데 대해 높게 평가받은 듯합니다. 이 그림은 한국의 미술대전에서도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행하게도 과도한 작업으로 인한 허리디스크 수술후 뇌일혈로 세상을 떠납니다. 60 즈음이었고 건강이 나쁘지 않았던 사람이라 한창 때 돌아간 것이죠. 김환기의 미술은 이후에도 지속적인 영감을 남겨서, 최근에 그의 고향인 신안에 미술관을 세우고 (현재는 서울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이 있죠), 세계 각지에서 미술가들이 참여하여 작품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김환기의 미술에 대한 열정, 소탈한 성품, 제자들에 대한 헌신 등 여러 측면에서 탁월한 미술가였음은 부인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록 김환기 미술에 마음이 확 당겨지지는 않지만, 저에게도 그 작품성과 내공은 분명 전해옵니다. 그런데 김환기에게 미술은 굉장히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되었고, 그래서 "수준"이라는 게 있다는 확신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김환기의 한계를 짚어보고 싶습니다.
저의 나름대로 예술관 또는 좁게는 미술관은 김환기와 반대입니다. 예술은 보편적이지도 않지만 수준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죠. 김환기에게는 미술작품 그 자체가 마치 과학의 이론이나 발명품 처럼 보편적인 기준의 성취가 있다고 보지만,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예술은 "누가-언제-어디서"라는 상황정보가 미술 작품을 우선한다고 보거든요. 똑같은 작품도 한국사람이 그렸느냐, 서양 사람이 그렸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는 것이에요. 이는 마치 미술 복제품이 절묘하게 원작이라고 속이지 않는 한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나 똑같아요.
김환기의 작품에 대한 의미를 제대로 부여하기 위해서는 김환기라는 "한국인"이 "50-60년대"의 "한국"이라는 공간에서 위치지워져 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가 위치한 시대와 공간이 과연 그가 추구한 심미적 탐구에 적합했는지를 따져하만 하는 것이죠. 그 당시 한국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죠. 한편으로 대중들은 가난했고, 다른 한편으로 권력은 살벌했죠. 가난과 독재 이것이 그를 둘러싼 환경인 것이죠. 제 나름대로 미술관에 따르면 그 시대의 핵심을 피해가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의 미술과 그의 삶에 있어서 그 환경은 전혀 변수가 아니었어요. 김환기와 그의 미술을 지금 이 시점의 한국에 옮겨와도 별로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에요.
좀더 명쾌하게 김환기와 그의 환경의 부조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환기와 강렬하게 대조를 이루는 윤이상을 떠올리면 됩니다. 윤이상은 전형적인 음악의 정통코스를 따라가는 사람이었죠. (그런 점을 순수하다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럼에도 윤이상은 머나넌 고국의 민주주의의 질곡과 분단에 늘 가슴 아파했죠. 그래서 동백림 사건 같은 것을 자초하기도 했구요. 통일주의자인 자신을 빨갱이라고 모는 모국엔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구요. 그에게 있어 고향 통영은 오매불망 그리움이었으면서도 말이죠. 윤이상의 미술형식은 '순수'한 것이었지만, 그는 항상 한국의 민중의 염원을 담고싶어했고 그 고통을 어루만지고자 했죠. 그런 점에서 한국이 상징하는 식민지해방국가들의 민중을 대변한 것이기도 하구요. 그의 작품은 추상화된 형식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전통음악들의 결을 서양음악속에 포착해낼려고 했구요. 이래서 그의 작품은 시대정신이라는 작품의 내용과 그리고 그만의 형식미(한국의 전통음악에 기대는)가 어울어진 음악세계를 만들어낸 것이죠.
윤이상과 대조적으로, 김환기에 있어서는 시대정신이란 실체가 없죠. 그 역시 한국의 전통과 산하를 사랑했죠. 하지만, 그가 놓인 그 시대의 한국을 피하고 조선의 십장생과 달항아리로 도피한 것이죠. 비록 십장생과 달항아리가 그의 손에서 아름답게 형상화되었지만, 그것은 현재적 의미가 없어진 추상에 불과한 것이고 그래서 표현양식에만 천착해버렸다고 볼 수 있는 거에요. 그에게 있어 십장생과 달항리는 소재에 불과해버린 것일 수 있는 거죠. 소재주의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이것은 그가 뉴욕에서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고 수평선-점 들의 표현양식이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자 (그 역시 그가 뉴욕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표현양식을 개발한 것이죠), 아예 더 추상적인 표현양식의 개발로 이어진 것과도 동일한 맥락이에요. 그에게 있어 미술은 새로운 표현양식을 개발해가는 과정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에요. 이것은 과학기술의 발달과정과도 유사하죠. "보다 나은 게" 있다는 거에요. 그의 극대화된 점 표현양식이 좋은 평을 얻었다고는 하지만, 이것마저도 어쩌면 어떻게 하면 orientalism을 구현할 수 있을까(그래야 그의 입지가 서니까요) 궁리끝에 얻어진 소재주의일 수 있어요. 시대정신이라는 고통스럽스럽지만 튼튼한 뿌리에 의지하지 못한 그의 미술은 이래서 소재주의 내지는 표현양식의 혁신과 같은 외적이고 형식적인 것들을 부유했다고 볼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의 미술에는 공허함이 있는 것이죠.
정말 탁월한 미술에 표현양식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알타미르 동굴벽화는 그것대로, 울산 반구대의 고래은 그것대로, 고구려 무용청의 벽화는 그것대로 모두 아름답고 한 시대의 미술을 가늠케 하는 것이죠. 저는 조선의 시대정신이 가장 압축된 그림은 김정희의 세한도라고 생각합니다. 남종화(선비들의 정신세계를 그린 그림)와 맞닿아 있다고는 하지만, 김정희의 세한도는 남종화의 매너리즘(정신세계를 그린 추상화라고 하지만 그게 역시 좀 뻔한 레파토리들과 표현양식으로 이루어지죠)에서도 벗어나 있습니다. 김정의 세한도는 그림을 잘 그리고자 해서 나올 수 있는 게 아니죠. 한 시대의 천재로 인정받았던 명문가 사대부가 당쟁의 와중에서 희생되어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고 제주도의 궁벽한 마을에 귀향와서, 근근히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처지에서 나온 그림이죠. 비록 하루를 내다보지 못하고 사는 삶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그림에는 사대부의 나라 조선 500년을 지탱해온 선비의 포부와 기백이 살아 있죠. 하지만 그것은 도도하기만 한 것이 아니고 극히 소박하고 간명합니다. 궁핍하기 짝이 없는 시골에서의 귀향이 만들어낸 겸손함이겠죠. 한없이 낮아져있지만, 그의 기백은 한 왕조를 지탱할만한 높음이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저는 김정희의 세한도가 조선을 대표하는 미술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예전에 학교 다닐 때는 그게 뭐 대단한 것인지 이해를 못하기도 했습니다만) 탁월한 미술은 형식이나 표현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미술을 관통하는 시대정신이 자연스럽게 그에 부합한 형식으로 귀착될 뿐이죠.
이중섭이나 박수근이 김환기와 연배가 비슷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김환기가 이중섭과 박수근과 얼마나 다른 삶의 궤적을 보냈는지 보입니다. 기쁠 것보다는 슬프고 고통스러운게 훨씬 더 자연스러웠던 당시의 한국에서 이중섭과 박수근은 그냥 있는 그대로 그의 주변의 대상들을 형상화시켰습니다. 특히 이중섭은 그 당시의 한국인의 평균적인 고통 이상의 고통을 스스로 감수해갔죠. 그가 굳이 한국의 시대정신을 대변하고자 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그의 미술작품에서는 한국이 절실하게 아로새겨있죠. 그의 작품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아련해지는 것이구요. 그가 담배곽의 은박지를 사용했던 것은 전혀 원했던 바는 아니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던 궁핍과 그의 은박지 미술이 염원하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절절하게 다가오죠. 그런 절박함과 절실함이 독특한 소재를 사용하기에 이른 것이죠. 이것은 절대 소재주의의 시각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요.
김환기의 작품에 대해 뉴욕에서 몬드리안에 필적하다고 하는 평이 있었지만, 저는 김환기는 김정희와 몬드리안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요. 그의 개성을 구축하기 위해서 김정희의 추상같은 형식을 빌려오지만 조선의 정신은 그에게 없었고, 몬드리안의 추상을 닮고 싶었지만 그는 서양사람은 아니었던 것이죠. 몬드리안은 당당하게 그가 살았던 서구의 모더니즘을 자신감 있게 경쾌하게 담아냈지만, 김환기가 그럴 수는 없었죠. 그의 선-점 형식도 만일에 서양 사람이 그렸다면, 아마도 몬드리안을 계승하며 동양적 사유를 담은 작품으로 더 높게 평가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예술(미술)은 "누가-언제-어디서"를 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김환기는 동양과 서양 사이에 어중간하게 놓여 있는 것이죠. 그래서 불행했다고 볼 수도 있구요(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거죠. 그는 여타 예술가보다는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 어중간한 지점이 또한 비로소 동-서가 만나는 토양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후대에는 보다 더 주목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환기는 그의 시대의 한국에서 적어도 일정한 "수준"이상의 문화/지식인층에서는 아이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마구 겉멋이 날리는 사람이 아니고 자기성찰적이고 겸손한 아이콘이죠. 그의 부인 역시 문학가였고 평생의 지적 동지였습니다. 그는 성북동의 기와집을 좋아했고, 이태준의 수연산방(역시 이태준 고택으로 지금도 유명)을 본따서 수향산방으로 집이름을 정했다고 합니다. <무량수정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로 유명한 미술사학자 최순우와 너무나도 다정해서 성북동으로 이사와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김환기가 성북동에 없을 때 최순우는 성북동에 와서 살았고, 이 집은 <최순우 고택>으로 유명합니다. 지금 언급한 3개의 집들이 다른 곳이라고 생각되는데, 같은 곳들인지는 좀 헷갈리네요. 비록 제가 그의 미술에 마음이 당기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한국의 문화와 예술, 그리고 지식에 있어서 큰 족적이고 귀감이라는데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의 미술의 한계(제가 생각하는)라는 것도 그의 개성과 그를 둘러싼 시대의 부조화겠지요. '순수미술'에 대해서는 별로 동의안하지만 '순수미술가'는 존재하고 존재할 수밖에 없거든요.
cf. 아마도 김환기와 비슷하게 불행했던 사람이(제 생각에) 천경자가 아닐런지요. 너무나도 서구적이고 모더니즘적이었던 화가인데, 그가 몸담고 자란 한국은 식민지에서 시작해서 분단과 개발독재에 이르기까지, 20세기 민중의 고통을 있는데로 모두 갖추었던 곳이었으니까요. 그의 미술을 서양사람이 그렸다면 자연스러웠을 테고 그래서 세계적으로 더 주목받았을 수 있을 텐데, 다만 한국사람이 그렸기 때문에 어색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