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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아이들의 진로에 방해가 안되는 게 최선

(2012.5.10 작성)

한국의 부모들은 자신들이 자식에 도움이 되고 싶어하고 도움이 된다고 믿죠. 하지만 현실은 그러한 믿음을 배반합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대게 자식들에 걸림돌이 됩니다. 물론 서구 사회도 부모의 기대와 자식이 안 맞는 면이 있죠. 하지만 한국 사회가 특히 심하죠. 그게 한국 사회의 획일화 때문입니다. 아래 기사에도 나오지만 한국의 부모들에게 떠오르는 직업이 20개밖에 되지 않거든요. 차라리 20년쯤 전에는 기업에 취직하면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기업도 불안하게 생각할 정도이니까요. 한국 사회가 산업사회에서 재미를 봤죠. 이게 좀 더 발전해서 사회의 다양성(후기산업사회와 같은 특징)이 안착해야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1997년 외환위기로 한국 사회가 급격히 위축되죠. 그래서 전반적으로 한국인들이 불안에 많이 시달리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부모가 아이들의 진로에 대해서도 아주 보수적인 태도를 지니게 된 것이에요.

 

그런데 어쨌든 한국 사회는 변화했어요. 상당히 다양한 사회로 가고 있고 그에 걸맞는 창의성/도전성이 요구되었죠. 물론 한국 사회에서 어쩔 수 없이 그런 다양성이 상당한 위험부담이나 저평가를 감수해야죠. 그렇지만 그렇다고 다른 길은 없어요. 원래 나이들면 어쩔 수 없이 보수화되는 면이 있는데 거기에 급격히 불안해진 사회에 내몰려진 부모 세대는 그 위험성이나 불확실성에 대해 훨씬 더 위험회피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이게 현실과 안 맞는 거에요. 그리고 그런 부모 세대가 나름 ‘안정적’이고 decent하다고 여기는 직업들이라는 것도 현실에서는 이미 기대에 못 미칩니다. 요즘에 변호사는 기업에 취직할 때 과장대리 대우밖에 못 받습니다. 개업한 의사들은 소원이 토요일에 온전히 가족과 함께 시간 보내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일요일에도 나와야 하는 의사들이 많아요. 정상적인 의료만으로는 수입이 안되니까 제약회사 리베이트 같은 유혹에도 쉽게 빠지는 면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빡빡한데 5-6년 준비해서 진입하면 여생이 편안한 그런 직업을 그냥 놔두고 있겠어요. 진입장벽은 어쩔 수 없이 낮아지게 되어 있거든요.

 

‘안정’이라는 단어는 참 매력적이지만 현실에서는 이미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좀 더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인생이라는 것 자체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생명체는 ‘불안정 균형’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거든요. “안정된 균형”이라는 것은 물리학적인 세계, 즉 죽어 있는 세계이지 생명체의 세계와는 전혀 안 어울리는 것이거든요. 워낙 많은 것을 가르쳐준 한국의 고등학교 교육 덕택에 지금 돌이켜봐도 고등학교교과서의 생물학 지식량이 대단해서, 항상성, 세포의 Na 대사와 같은 개념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때도 나름 소박하게 신기하다고는 생각했어요. 어떻게 생명체가 그런 역동적인(즉 불안정한) 균형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인지 말이죠. 그런데 그런 균형이라는 게 불안정해서 깨지면 한 순간에 깨지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불안정성을 본질적으로 회피하면 그것은 이미 생명체가 아니죠.

 

한 인생을 꾸려가는 것 자체가 저는 위대한 venture라고 봐요. 기업을 꾸려가는 게 대단하겠습니까? 하나의 생명체를 꾸려가는 게 더 대단하겠습니까? 당연히 후자죠. 기업이 망한다고 해도 그거야 추상적인 조직이 해체되는 것일 뿐이죠. 그런데 인생에서 하는 모든 일은 기본적으로 ‘인생을 걸 수 밖에 없는 벤처’인 것입니다. 인생보다 더 큰 stake는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인생을 억지로 안정스럽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비현실적인 착각입니다. 그래서 좋은 결과가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달리는 자전거죠. 자전거가 멈춰 있으면야 가장 안정적인 것이지만 누가 멈춰 있는 자전거에 앉아 있을려고만 하겠습니다. 자전거를 보면 한 번 달리게 되죠. 자전거 바퀴가 왼쪽으로 틀어지거나 자전거가 왼쪽으로 기운다고 해서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억지로 틀면 넘어질 뿐입니다. 그냥 기운 방향으로 가 주는 게 그나마 더 균형(불안정하지만)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죠.

 

부모 입장에서 자꾸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게 됩니다. 아이가 약간 좌나 우로 틀어진다 싶으면 개입해서 ‘똑바로’ 맞추고 싶은 욕구를 못 견디죠. 그런데 그게 비극의 출발점입니다. 달리는 자전거는 달리면서도나름대로 균형을 잡는 요령이 있는데 그렇게 부모가 억지로 붙잡아 주면 그런 요령이 생길 기회를 막아 버리죠. 그런데 그나마 부모가 생각하는 ‘똑바로’라는 게 정말 optimal path인지는 더더욱 미지수죠. 아이들은 이미 부모 세대와는 30년을 뛴 세계를 살아갑니다. 요새 같이 빨리 변하는 시대에 30년 간격의 두 세계는 정말 다른 세계입니다. 일반적인 부모는 ‘30년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illiterate하다고 봐야 맞습니다. 30년 후의 세계의 언어 자체를 제대로 모른다는 것이에요. 물론 말을 주고 받으니까 그 언어를 안다고 착각할 뿐입니다. 언어는 고도의 기술이거든요. ‘아’와 ‘어’ 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연이 있는 것이에요. 그러한 미묘한 차이지만 엄청난 차이가 부모와 자식의 언어에 존재합니다. 그러니 감히 부모가 자식들이 살아갈 세계에 대해 개입하려고 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아이들이 그래도 가장 자기들이 살아 가야할 세계에 대해 잘 압니다. 물론 실패도 할 수 있겠지만 그래도 부모가 실패할 확률보다는 그래도 훨씬 낮아요. 그래서 ‘어른 말 들어서 잘 못된 경우는 없다’라는 것은 잘 못 된 믿음입니다. ‘어른 말 들으면 실패할 확률이 크다’는 게 맞습니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도 이미 부모 세대와 아이 세대는 다릅니다. 한국의 부모 세대는 ‘일하는 즐거움’이라는 게 굉장히 생소한 개념이에요. 그냥 남들 보기에 때갈 좋고 그냥 급여 잘 나오고 하면 됩니다. 일은 주체와 분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아니에요. 물론 괜챦은 외적인 조건들이 보장되면 좋지만 그것보다 못지 않은 가치가 ‘일의 즐거움’이에요. 무슨 일을 하냐는 것은 사회적인 평판은 있을지 모르지만(그렇게 사회적 평판에 따른 직업서열이 있다고 믿는 게 획일화된 부모 세대의 착각이죠) 개인에게 있어서는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그냥 그 일이 재밌으면 가장 최고죠. 그리고 재밌게 하는 일은 그 자체로도 성공이지만 사회적인 통념에서도 실패일 턱이 없습니다. 엄청나게 다양하고 더 다양해지는 세상이거든요. 한 개인이 아주 이상한 싸이코가 아닌 다음에야 한 개인이 즐거워하는 일과 그 산출물은 분명히 다른 사람에게도 공유될 수밖에 없습니다. 공원에 어떤 이가 혼자서 너무나도 심취해서 특이한 활동을 한다면(체조도 좋고 음악 연주도 좋고), 당연히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죠. 요러한 공감이 금전적인 관계로 제도화되는 것일 뿐이에요. 지금 아이들에게 필요하는 것은 반사회적이지만 않다면 그처럼 공원에서 혼자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 시대에요. 이게 큰 사회적 recognition으로 이어질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적어도 그런 삶이 개인에게는 이미 성공이죠.

 

지금의 시대가 기본적으로 먹는 게 안 되는 것은 아니죠. 노숙자도 굶기지는 않을 수 있을 정도의 생산성은 충분히 되죠. 오히려 문제는 노숙자들의 경우 이미 스스로 demoralized 상태가 되버린 것이 큰 문제죠. 노숙은 그냥 실패한 삶의 모습으로 간주해버리지만 그것을 철학적인 소신으로 갖고 있으면 그것도 성공입니다. 아주 오래 전 스토리로, 알렉산더가 디오게네스라는 길거리 철학자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디오게네스는 그냥 ‘햇빛을 가로막지 말면 된다’고 말했다고 하죠. 최근에 런던의 어떤 노숙자는 본인의 오랜 노숙의 경험을 바탕으로 관광가이드를 한다고 합니다. 워낙 길거리 곳곳을 잘 알기도 하지만, 그의 가이드가 추상적인 정보가 아니라 한 개인의 인생의 pathos가 베여 있는 스토리인 것이죠.

 

요즈음 방송대학 유선 채널에서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라는 70년대 드라마를 방영합니다. 지금 봐도 재밌습니다. 계약법의 대가인 킹스필드가 드라마의 기둥이죠. 킹스필드는 혹독하게 훈련을 시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혹독함이 그냥 워커홀릭의 그런 편집은 아닙니다. 실전 상황에서 때 그런 훈련을 통해 얻은 지식, 훈련 자체가 가하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견디는 법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정말 감동적인 면모는 킹스필드가 공부를 못하는 것에 대해 지극히 쌀쌀맞은 태도를 취하면서도 절대 학생의 인격을 훼손시키는 발언이나 행동은 안 합니다. 드라마에도 보면 자주 등장하는 스토리가 법조계 명문가 출신의 학생이 본인의 적성이나 뜻과는 무관하게 법대에 와서 굉장히 스트레스도 받고 자의식에 큰 상처를 받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법대를 나가겠다고 킹스필드 교수를 만나서 말합니다. 그러면 킹스필드는 요런 말을 하죠. ‘너가 멍청한 학생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관심 없는 일을 하는데 잘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새롭게 용기를 해서 원하는 일을 한다면 정말 잘 할 것이다.’ 킹스필드의 혹독한 훈련의 가장 큰 미덕은 사실은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를 필터링해준다는 것이에요. 그냥 편안하면 그것을 잘 모르거든요. 상당한 스트레스가 동반되면 비로소 하나의 일에 대한 본인의 열정과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가 가려집니다. 머리가 좋고 나쁘고 초기 조건이 좋고 나쁘고는 거의 안 중요합니다. 결국 열정이 말하거든요. 그것이 주인공 하트에 의해서 보여집니다. 하버드 법대 정도면 화려한 가족사를 가지고 있는 학생들이 많은데 하트는 정말 위스콘신의 시골 출신이거든요(옛날에는 이 것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미국에 좀 살아보니까 팍 와닿아요). 아르바이트도 하면서 돈도 벌어야 하는 아주 어려운 여건인데, 하트는 오직 킹스필드에 꽂혀 있거든요. 킹스필드가 아무리 혹독해도(물론 불만을 표현할 때도 있죠) 그를 role model삼아서 성장하는 것이죠.  

 

열정 또는 동기부여가 지식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요즘 대기업의 고졸 출신 채용 기사가 많이 뜨죠(아래 링크). 혹자는 이것을 유행 같은 것 아닌가? 또 다른 혹자는 고졸 출신을 착취하는 것 아닌가? 의문을 제기할 것입니다. 저는 별로 동의 안 합니다. 한국의 대학이라는 게 하나의 습관이 되버린지 오래입니다. 차라리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십대다운 ‘꽂힘’이 있습니다. 그 나이 때는 뭐 하나에 꽂히면 완전히 몰입하거든요. 그리고 겸손합니다. 사회가 자신들에게 대단한 대우를 해줘야 한다고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꽃혀서 하는 일에 대해 사회가 인정(취업)해준다는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겸손함이 있습니다. KBS에서 하는 ‘꿈의 기업의 스카우트’도 고등학교(주로 특성화교) 학생들이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mission수행을 하고 그 결과를 평가받습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이미 매너리즘에 빠진 대졸자들에게는 없는 순수함과 열정이 있습니다. 한국의 대학은 오히려 아이들을 관습화시키거든요. 철저하게 공급자인 교수 중심의 수업을 하죠. 학생들은 그런 수업을 받으면서 오히려 인생에서 뭘해야 하는 지 방향을 상실합니다. 그러다가 그냥 자신의 동기가 무엇인지 까맣게 잊고 그냥 사회적 기대인 ‘안정적인 괜챦은’ 취업에 내몰립니다. 그러면서 획일화된 스펙 따기에 바빠지는 것이죠. 이미 젊은이가 아니에요. 과거 대학생들에게 느꼈던 그런 ‘젊음’을 이제 대학생에게는 찾을 수가 없고 고등학생(특히 목적 지향성이 강한 특성화고 학생들)에세 느끼게 되는 것이죠. 대학교 4년 교육은 하나도 안 중요합니다. 오히려 학생들을 demoralize 시킵니다. 차라리 패기 있는 고졸자를 데려다가 on-the-job-training하고 다른 한편으로 적절한 방식과 프로그램으로 대학교육의 기회를 받을 수 있게 배려해주는 게 훨씬 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생산성이 높습니다. 대기업의 고졸 채용은 보다 높은 생산성을 추구하는 기업의 생리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부모들의 착각이 자식들에게 말로 가르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죠. 그런데 자식들은 이미 상당 부분 성향은 부모에게서 물려 받습니다(이게 하나의 종()이 계속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당연한 생명체의 법칙이죠). 자식들이 훌륭한 인격체이기를 원한다면 부모들이 스스로 구현하면 됩니다. 그것보다도 더 어렵고 좋은 교육은 없습니다. 그게 부모가 해줄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부모가 좋은 role model이 되었다면 자식들은 훨씬 더 쉽게 그것을 체화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쉽고 자연스럽게 여겨지거든요. 부모가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면, 아무리 다른 role model을 제시해줘도 습득하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아주 추상적인 남의 일로 여겨지거든요. 자식들의 진로? 부모가 도저히 접근할 수도 없고 시도해서도 안 되는 부모세대로서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입니다. 아이들이 혹시 부모 말을 안듣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착각입니다. 아무리 아이들이 부모말을 안 듣는 것 같아도 생명체의 종의 법칙상 부모는 엄청나게 영향력 있는 존재입니다. 부모가 부지불식간에 ‘안정’이라는 단어를 한 번 만 입밖에 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에게는 수갑 같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알아서 길을 찾아가게 내버려둘 줄 아는 게 부모의 진정한 용기입니다. 그 불확실성과 위험성을(부모 입장에서는 요게 훨씬 더 과대평가되죠) 버틸 수 있는 냉정함과 배짱이 있어야 해요. 그게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핑계되면 안됩니다. 아래 기사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하는 부모들이 이미 있거든요. 그러다가 아이가 아마도 도움을 요청할 때가 있죠. 이 때 도와줄 수 있는 준비를 해두면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것까지. 아이가 사교육 받기 싫어하면 사교육 시키지 말고 그 돈을 아껴뒀다가, 나중에 아이가 혹시 정말 돈이 필요로 하는 때가 오면 그때 도와주는 게 물질적인 면에서도 최선의 자원 배분입니다. 가장 때깔나고 효과적인 도움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정작 헤프게 돕다 보면 도움도 안될 뿐만 아니라 결정적일 때 못 돕습니다. 결정적일 때 도움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역량을 준비해야 합니다.    

 

Everyone an innovator? Well, we all invent our own lives, just as we collectively invent the future. John A. Alic (2011) Everyone as Innovator, in Fred Block and Matthew R. Keller, ed. State of Innovation: the U.S. Governments Role in Technology Development

 

http://news.nate.com/view/20120509n31650

삼성 고졸채용, 합격자 사연 들어보니…'감동'

 

http://news.nate.com/view/20120509n28876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3) 하고 싶은 일 하는 게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