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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는 역시 남도다: 광주, 시대정신을 예술로 구현하는 곳


(2010.8.3)

8월이 넘어서면 본격적으로 그 해의 수확을 의식하게 됩니다. 지난주 금요일부터 어제 월요일까지 남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까, 8월로 넘어간 달력이 눈에 확 들어오면서 긴장감이 생깁니다.  

여행을 마치고 좋은 감흥과 배움이 있으면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되도록이면 바로. 기억이 계속될 것 같지만 참 취약하기도 하고 속이기도 쉬워서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지기도 하고 또는 잘못된 기억을 붙잡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둔필승총([鈍筆勝聰] 은 참 멋진 금언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전에 기록을 남길 때면 잘 몰랐던 그 가치가 후에 드러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쫓겨 살다보면 그 금언을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은데, 이렇게 두어 시간이라도 이렇게 바로 글을 남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큰 행운이죠. 기억을 허공에 날려버리지 않고 화석으로 영구히 붙잡아 둘 수 있는 것이 기록의 힘이죠.

한국은 좁다 이렇게들 통상적으로 생각하죠. 저도 그렇구요. 그런데, 정작 다녀보면 참 넓다는 느낌이 듭니다. 3박4일의 일정으로는 전라남도의 일부를 여행하는데도 빠뜨린 것들의 수가 챙긴 것들의 수보다 많습니다. 좀더 시간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다른 지역의 여행을 했을 때도 남습니다. 한국이 20세기에 급격하게 세계에 준비안된 채 던져진 셈이어서 한국은 작고 약하다는 느낌을 형성한 측면이 있습니다. 한국의 면적은 세계은행의 DB에서 보면, 북한이나 남한이나 각각 100 언저리이지만 한반도는 80위 대입니다. 대상국가가 210개이니까 남북한을 각각 보거가 합해서 보거나 그렇게 작다고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작다고 느끼죠. 그리고 morning calm, 타고르의 '동방의 등블"과 같이 동양적 신비한 이미지(orientalism), 여성화된 이미지, 또는 작은 이미지를 한국사람 스스로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면이 있습니다. 20세기 내내 한국 사람들은 스스로에 대한 저평가를 당연히 감수하고 스스로 감행해온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사람들이 한국보다 고평가해온 유럽의 많은 국가들이 오히려 한국보다 작다는 것은 잊어버리죠. 국토면적은 객관적이기도 하지만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국토에 많은 이야기가 서려있다면, 결코 작을 수가 없죠. 하지만, 국토에 그러한 인문적 주관(이야기)이 개입해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물리적으로 큰 국토라도 작게 느껴지죠. 감동적인 영화를 보고 나오면, 비록 영화는 끝났을지언정 영화의 인물들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런 영화가 끝날지언정 관객들은 쉽게 극장을 떠나지 못하고 엔딩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에야 비로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떠나게 됩니다. 이렇게 좋은 영화는 캐릭터를 남기게 되는 것이지요. 저는 국토도 마찬가지락 생각합니다. 물리적인 사이즈가 문제가 아니고, 국토를 이루는 크고 작은 지역이 캐릭터를 남길 수 있다면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에 전라남도의 몇 개의 군들을 여행하면서 그러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개성없는 산과 강이 아니라, 지역 곳곳이 감동을 전해주는 캐릭터로 마음 속에 살아있는 것이죠.

최근에 통영과 거제를 다녀오면서 다음 코스는 전라남도일 것이다라고 짐작해두었습니다. 국토의 오른편이 그렇게 아름다울 진데, 공식명칭보다도 "남도南道"라는 아득한 낭만이 풍겨오는 속칭이 더 어울리는 국토의 오른편은 얼마나 좋을까하는 기대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과연 청년기에 뭐하고 중년에 새삼 한국의 지역들에 탐닉하는지 부꾸럽기도 하지만, 저는 여행은 중년기의 생활스타일에 더 맞다고 생각됩니다. 청년기엔 미처 국토를 두루 돌보기엔 하루하루가 급하죠. 그 하루하루를 구성하는 일상의 문화가 보다 크게 다가오구요. 저로서는 일상에 재밌어하고 바쁜 청년기를 보낸 뒤엔 미국으로 오랫동안 떠나있어서 중년에야 비로소 국토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마음에 여유가 생긴 것이죠(이것도 가끔입니다만).  

남도라는 단어는 원래는 충청도 등 경기도 밑의 지역을 뜻한 것이죠. 그래서 삼남하면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뜻했죠. 그런데 남도민요라고 할 때는 경상도와 전라도의 민요를 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도가 갖는 기후적 특징, 먹고사는 특징, 문화의 특징들이 도드라지는 것은 역시 남쪽 해안을 끼고 있는 지역들이어서 남도에서 떠오르는 관념은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입니다. 거기에 조선의 지식인들(특히 우리의 기억에 가까운 조선후기엔 정치적으로 핍박받았던 남인)의 유배지였고, 고부군수에 저항해 일어난 동학농민전쟁, 그리고 해방후와 6.25의 이념대립의 와중에 일어난 4.3항쟁, 빨치산의 주무대였고, 그리고 1980년 광주항쟁의 주무대가 국토의 서남쪽이 되면서 지금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 남도는 전라남도 (또는 제주도)와 같은 이미지가 강합니다. 이러한 저의 관념은 개인적인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남도 현대 시문학의 산책>(전라남도 춢판부)이란 책에서는 "남도 시인"이라고 해서 전라남도 출신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저자 김선기는 남도일보 논설실장이군요.) 이중에는 당연히 김남주와 김지하가 있구요, 좀더 멀게는 김영랑이 있습니다. <한국 현대시의 형상성과 풍경의 깊이>(전남대학교출판부)에서도 "남도시인"이란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김지하의 황토길에서 확 풍겨오는 흙냄세는 당연히 그 남도 어딘가일 것이란 느낌을 주죠. 좀더 크게 보면 전라도는 보성/구례의 좌도 농악과 동편제 그리고 화순,보성 등의 우도농악과 서편제를 만들어내었죠. 그리고 진도는 지금도 아리랑, 육자배기, 성주풀이와 강강수월래가 전통이 아닌 현재진형형 음악이구요. 정치적으로는 리버럴하거나 혁명적이고, 문화적으로는 낭만적이었으며, 적어도 농업이 주요한 시대에는 한국의 경제중심지였지만 공업화과정에서는 경부선축에 밀려야 했던 이러한 독특한 경험들의 교집합이 지금의 전라남도(크게는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또는 보다 작게는 전라남도의 해안근처의 지역들을 "남도"라고 관념화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유흥준이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권의 제목이 남도답사 일번지죠(이 참에 또 샀습니다. 놀랍게도 지금도 서점에서 판매됩니다). 저자는 남도답사일번지라는 본문속의 소제목하에 다시 강진, 해남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유흥준은 명확하게 남도가 어딘지를 서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본문의 목차를 감안할 때 아마도 유흥준은 남도를 일반적으로 서술하고(삼남을 포함) 그 답사의 일번지로서 강진/해남을 제시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남도답사 일번지>라는 표제가 워낙 강력하게 사람들을 휘어잡아려서 아예 "남도=강진/해남"의 이미지도 형성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본문에 있었던 담양은 해남에서 멀지 않는데도 아쉽게도 "남도"라는 관광문화시대의 멋진 타이틀에서 멀어져 버린 듯합니다.  

이러한 "남도"에 대한 설레임을 안고 폭염을 무릅쓰고 달려내려간 것이죠. 저 역시 유흥준을 따라서 강진/해남이 주요 목적지였습니다. 하지만 목적만 있을 뿐 고정된 계획은 없었죠. 여행은 예기치 않는 곳도 향하게 되고 그래서 예기치 않은 열매를 얻게 되죠. 날씨가 아주 더워서 일반적으로 여행에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남도에 어울리는 가장 어울리는 계절은 여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황토길이 가장 황토길 다울 때는 폭염이 몰아칠 때입니다. 저 역시 유년시절 목포에서 성장해서 폭염속의 황토길에 대한 강렬한 인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김지하의 <황토길>을 접했을 때 언어적 이해가 아니라 아주 쉽게 그냥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남도, 낭만, 저항, 황토길, 농민, 분노, 폭염 이러한 단어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습니다.

1. 광주: 시대정신을 예술로 구현하는 곳

제가 계획성이 없고 게을러서 저녁무렵에야 담양에 도착했습니다. 사람들이 좋다고 하고 유흥준이 탁월한 정원미학(정원은 일본말이고 전통적으로는 원림 이라고 했다고 합니다)이다고 평한 소쇄원을 들를 수 있는 시간은 되어서 스치듯이 훑어보았습니다. 대나무숲이 여름이랑 잘 어울리기도 했고 대나무숲이 고즈넉하면서도 포근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정원처럼 정적인 것에는 안목을 갖추지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장소에 내재된 이야기에는 관심이 많은데, 조광조의 제자인 양산보가 조광조의 숙청이후 세상을 피해서 살았다는 것 정도에는 그렇게 마음이 끌리지는 않더군요. 급하게 담양에서 유명한 메타스퀘이어 길에 들려보았습니다. 가로수길이 길고 가로수는 우람하더군요. 차분한 마음으로 걷다보면 보다 감흥이 컸을 텐데, 이미 어두어질려고 해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정철을 중심으로 한 가사문학관, 대나무정원인 죽녹원 등은 들르지를 못했습니다. 사람과 사람처럼 장소와 사람도 인연이 있는 듯합니다. 여유있을 때는 알아볼 수 있는 곳이 미처 그럴 기회를 못 갖고 오히려 선입견이 형성되어서 인연이 어렵게야 만들어지는 경우 같은 거죠.

강진을 바로 내려갈까, 광주에서 일박을 하고 광주에서 하루 시간을 보낼까 하는 고심을 했습니다만, 결론은 의지가 아닌 환경이 결정했습니다. 내비게이션이 없다보니까(지금도 별로 안좋아합니다) 멀리 밤길은 부담스럽더군요. 그래서 광주의 도심의 유흥업소 거리에 있는 모텔에서 3만 원으로 싸게 묵었습니다. 묵고 가면 그만인 방에 많은 비용을 들이기는 아깝더군요.

광주는 나름 안다고 가정을 하고 있었죠. 목포에서 가깝기도 했구요. 아버지가 전남대학교 졸업생이도 하구요.(아버지 학교시절의 사진의 배경 중 경사로 위의 로마식 건물-아마도 상과대학-이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1990년도엔가 무렵에 광주지방병무청에서 병역 신체검사를 받기도 했구요. 그리고 대학시절에 광주는 1980년 민중항쟁과 무거운 짐으로 머리한켠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막상 제가 광주를 방문한 적은 이번이 이번이 고작 두번째인듯합니다. 게다가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 이곳저곳 위치도 확인하면서 다니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도청, 금남로, 망월동 등의 무수한 광주의 이미지들을 확인해보고 싶었구요,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친밀하고 그리고 역사적으로 중요한 전남대학교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현재적 의미에서는 (그리고 이게 지금으로서는 저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광주의 '아시아 문화 수도'라는 비전의 진행과 가능성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점심이 다되어서야 (여행가면 이 시간이 숙소를 나오는 시간입니다) 전남대를 들러보는 것으로 광주여행을 시작했습니다. 1990년도에 방문할 때만 해도 아버지 사진 속의 건물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번엔 어렵더군요. 학교가 많이 변해서 예전 방문했을 때의 기억이 재생되지 않더라구요. 아마도 지금의 인문대학이 그 건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범대학 건물 벽에는 반갑게도 1990년을 전후한 시기에 그려졌음직한 민중화가 있더군요.("대동세상"과 같은 이미지의) 학원이 민주화되는 1980년대에 학원을 중심으로 민중예술이 융성했었죠. 그 덕에 민요도 많이 접하고 오윤과 같은 판화미술도 알게 되었죠.(오윤은 이제 한국미술의 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죠-국립미술관에서 몇년전에 오윤 특별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시위에서 전남대/조선대의 남총련이 대단했죠. 캠퍼스에 지금도 신기하게 한총련의 하계 모임이 있나봅니다. 환영플래카드가 보이더라구요.   

조금 어렵게 찾아간 사회과학대학(혹시 사회과학관이 옛날 사진 속 건물이 아닌가 싶어서)에서 생각도 못했던 중요한 장면에 맞닥드립니다. 윤상원의 동상과 추모비를 보았습니다. 동상(아래 사진)도 탁월한 예술성이 있다 싶습니다. 목 위부분과 손만 제시되어 있네요. 보통 흉상이 답답하거나 딱딱한 느낌을 주는데, 이러한 동상은 무척이나 역동적입니다. 그리고 또한 손이  강조된 것도 그 손은 골똘히 생각하는 얼굴을 받치고 있는 점도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실천가이면서 동시에 전략가인 그와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동상 아래의 받침도 소박한 돌무더기여서 입방형의 폐쇄된 일반적인 받침보다도 훨씬 더 윤상원의 이미지를 잘 구현했다 싶습니다. 주제와 형식이 잘 어울린 탁월한 미학적 성취라고 생각됩니다. 훌륭한 주제는 이렇게 예술가의 감흥을 일깨우는 듯합니다(성북동 길상사 마당의 마리아를 닮은 관음보살상에서도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대학교 때 윤상원에 대한 평전을 보면서 들불야학, 영혼결혼, 도청에서의 옥쇄에 대한 그의 실천적인 삶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받으면서 내가 그 상황에서 과연 그처럼 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희미한 부정밖에 할 수 없는 것에 자괴감을 갖었습니다. 전태일 평전(나중에 조영래 변호사가 저술한 것으로 밝혀졌죠)에 이어서 소심한 청년에게 있어 감동과 무거운 실존의 고통으로 다가왔죠.


저는 윤상원을 배출한 그리고 광주항쟁을 이끈 전남대에 대해서 무한한 존경심을 갖고 있습니다. 한국의 근대교육체계가 전통적인 교육체계를 무너뜨리고 들어서서, 다분히 근대화담론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는 근대화의 개혁대상이었고 한국인은 계몽대상이었죠. 그래서 대학 그리고 대학 출신은 다분히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죠. 1960년 419혁명 때 헌신을 보여주었지만, 참여자들은 빠른 속도로 제도권에 흡수되고 개발국가의 테크노크라트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1980년대 518항쟁 때야 비로소 전남대는 목숨을 걸고 민중항쟁에 앞장서게 됩니다. 근대사에 이처럼 지식인이 헌신적으로 한국사를 만들어가는데 참여했던 것은 광주항쟁 그리고 전남대가 처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남대를 계기로 비로서 한국대학이 계몽적/낭만적 엘리트주의에서 민중의 아들로서 그 실천적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 남부에서 형성된 민병대가 라마르세즈(지금의 프랑스 국가, 상당히 과격하죠)를 부르며 반혁명 전투에 희생함으로써 프랑스에 비로소 의식과 민족국가가 싹텄던 것처럼, 518과 전남대를 비롯한 광주시민의 희생 위에서 계몽주의에 틀을 깨고 한국의 지식인은 민중성을 내면화하였다고 생각합니다(그리고 우리에게는 '오월의 노래'가 남았습니다). 그러한 면에서 전남대는 한국지성사의 정통으로 손색이 없습니다. 전남대는 그 뿌리깊은 민중성으로 송기숙 교수같은 진보적 교수들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이미 전남대는 1970년대부터 윤상원을 배태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518항쟁은 그 열매라고 볼 수도 있겠구요.  

전남대는 과거의 향기도 있지만 이제는 많이 현대화되었고 또한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많은 수의 공대건물들을 보면서 상당한 실용성과 기능성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윤상원이 대학졸업생이던 때보다 지금의 지방의 국립대는 훨씬 어렵다고 할 수 있죠. 윤상원은 은행원이란 편안한 직업을 포기하고 민중운동에 뛰어들죠. 지금은 지방을 대표하는 국립대학의 졸업생에게 은행도 높은 문턱이죠. 제가 아주 어려서 목포에서 가끔 신문에 전남대학에 합격한 가난한 학생들의 신문기사가 실리면, 인재가 돈때문에 공부를 포기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물심양면으로 기부금이 몰리곤 했었습니다. 전남대학은 1951년 국립대학체제로의 전환기부터 도민들로부터 많은 기부금에 의해 기반이 마련된 대학입니다. 설립부터 그만큼 도민들의 사랑이 컸던 대학입니다. 그만큼 자부심이 강한 대학이지만, 전국의 대학들이 당연히 취업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골몰할 수밖에 없는데 이제는 지방이 자부심의 원천이 아니라 핸디캡이 되어버린 현실에서 전남대 역시 현실적 방안들을 찾아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바램은 전남대가 한국의 민주화와 민중운동의 정통성이 학문과 예술로 계승되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시내 중심가를 돌다보면 꼭 원하지 않아도 도청앞의 넓은 공사현장을 지나게 됩니다. 제가 어쩌다 방문한 사람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도청과 금남로는 지금도 지나는 저를 숙연케 합니다. 과거 518항쟁의 상징인 구 도청(현재의 도청은 신안으로 이전)과 그 앞 분수대 광장을 포함한 넓은 땅이 '아시아문화의 전당'으로 재탄생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볼 수 있는 것은 공사간막이밖에 없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봐야 합니다.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이고 수 조원이 투입되는 방대한 사업입니다. 그런데 저는 공간을 차지하는 건물들이 공연장이나 연구하는 장소 등이고 미술관이 없다는 게 무척 마음에 걸립니다. 문화창조원 같이 문화컨텐츠 제작센터와 같은 다분히 기능적인 시설물에도 그리 마음이 편치가 않구요. 시립미술관과 바로 옆 비엔날레 전시관(이곳도 방문)과의 상보적인 측면을 고려했을까요?

미술관이 중요한 이유는 그 대중성과 역사성 때문입니다. 미술은 무의식적일지언정 누구나 하죠. 그리고 그것이 폐기되지 않는 한 몇천 년을 갑니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시절에 남긴 작품또한 시대성을 담아내기 때문에 위대한 유산이 됩니다. 이중섭의 담배곽 은종이에 못으로 남긴 명작들처럼, 가난한 미술가들이 가난한 소재로 남긴 작품이 그래서 또 빛나는 작품으로 기억됩니다.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인 알타미르는 15,000 년을 지난 지금도 멋진 미술관이죠.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는 구석기 후기에 만들어졌지만, 지금도 엄연히 당당한 야외 미술관입니다. 고구려 무용총의 벽화는 지금에 있어서도 우리를 흥분시키죠. 미술은 가장 직관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시대정신을 대변합니다. 음악은 그 형식미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보수성이 강하고 진입장벽이 높죠. 유학적 전통에서도 음악은 수양의 수단으로 강조되었죠. 하지만, 미술은 아니었습니다. 미술은 때로 직설적으로 때로는 은유적으로 새로운 시대를 예고해왔습니다. 미술은 혁명의 엠블렘 역할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그 파괴적인 상징적으로 기득권 세력을 조롱하고 혁명을 도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대의 흐름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미술관을 가야합니다. 제가 미술적 안목이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이라도 비록 주마간산격이지만 미술관을 가는 이유가 그러합니다. 그리고 타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도 미술관을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낯선 도시에 갔을 때 가능한한 그 도시를 대표하는 미술관을 갑니다.

저는 한국에서 광주만큼, 넓게는 전남, 그리고 더 넓게는 호남처럼 미술(보다 넓게는 예술)에 맞는 지역이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유흥준이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짚어둔 것처럼, '식당, 다방 심지어는 담배가게에도 그림과 글씨가 주렁주렁 걸려'있는 곳이 전라남도입니다. 저도 유년기에도 무심히 남농 허건 등 소치가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입니다.저희 아버지처럼 평범한 분도 허건에게서 그림을 배운 적이 있을 정도로 이 지역의 예술에 대한 로망은 대단합니다. 같은  비록 공업화시기의 혜택에서 배제되어 저발전 지역이 되어버렸지만, 호남은 가장 유복한 지역이었죠. 그러니까 예술이라는 귀족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구요. 그러다보니 서민들도 자연히 그런 취향에 젖구요. 비록 상대적으로 가난했을지언정 호남 사람들의 예술에 대한 사랑은 제 개인의 가족사에서도 얼마든지 들어납니다. 저도 그러한 분위기에서 비록 겉멋에 불과하겠지만 슬그머니 예술에 조금이나마 아는 채 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주는 518항쟁을 계기로 한국의 민주주의의 시대정신을 스스로 압축하게 됩니다. 군부독재가 2차대전 이후 많은 식민지에서 벗어난 저개발국가에 만연한 것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민주주의는 동시에 전 세계적인 상징성과 대표성을 갖는 것이기도 합니다. 저는 호남의 예술에 대한 토양과 518항쟁을 계기로 광주가 아프게 끌어안은 시대정신이 광주의 비엔날레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있는 배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비엔날레가 처음 열릴 때 이게 상대적으로 외진 지역에서 가능할지 의구심도 있었습니다. (광주가 150만, 광주를 제외한 전남이 200만의 인구이지만 서울로의 쏠림이 워낙 심한 한국에서는 그 정도의 인구는 대수롭지 않게 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비엔날레를 통해서 한국을 넘어서서 아시아의 시대정신을 이끌어갈 수 있음을 입증했습니다. 광주비엔날레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로 넘어오면서 여러 지방자치단체가 아주 창의적으로 이끌로 있는 문화행사 중에 으뜸가는 행사가 되었구요.

저는 이런 비엔날레에 기반하되 보다 안정적이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치는 상시 미술관이 광주에, 더욱이 518정신이 여전히 느껴지는 구 도청 지역에 건설되면 하고 바라왔습니다. 뉴욕이 멋진 곳이고 많은 랜드마크가 있지만, 저는 뉴욕의 색깔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구겐하임 미술관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랭크 라이트라는 세계적 건축가가 만든 이 곳은 여전히 그 독특한 개성으로 인해서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움이 있습니다. 가우디가 만든 바르셀로나의 건축물들은 지금도 현대적이죠. 구겐하임 미술관은 현대의 역사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은 단순한 전시를 한다기 보다는 '미술을 정의하는' 미술관이라고 생각합니다. 시대정신을 미술이라는 매체로 대변하는 것이죠. 제가 한번밖에 안갔지만, 말보로맨 같은 상징을 만들어낸 Leo Burnett의 상업미술들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과문할 수도 있을 텐데, 이러한 구겐하임의 시도는 미술의 고전적인 관념을 바꾸고 있는 것이죠. 백남준 역시 구겐하임에서 조명되는 영예를 누렸구요. 세계의 문화를 이끌어가는 상징성이 있고 그만큼 도전적이고 cosmopolitan한 도시와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외관에 있어서나 그 잠재적 컨텐츠에 있어서나 혁신적인 미술관이 광주에 있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미술관은 '아시아 문화 중심'이라는 광주의 모토를 대변하고 구체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미술관을 통해서 아시아의 탁월한 작가들이 발굴되고 그래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다면 이로서 광주의 모토를 구현할 수 있는 것이죠. 마치 부산영화제가 아시아 영화의 창의 역할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부산 그리고 한국이 아시아와 세계를 잇는 교량 역할을 한 것과 같겠죠. 이런 위상의 미술관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세계 각지에서 그리고 한국의 각지에서 의례 광주의 미술관을 방문하는게 당연한 코스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광주의 문화의 전당이 한국 차원의, 사실은 우려스럽지만 지역 차원의 문화공간이 아니라 한국과 세계의 문화공간이 될 수 있는 것이죠. 빌바오의 구겐하임미술관은 철광산업의 퇴조와 더불어 쇠퇴한 빌바오 지역을 새롭게 재생시킨 성공한 모델입니다. 훌륭한 미술관은 이렇게 지역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미술관은 당연히 준비되고 있으려니 믿고 그 건축 디자인이 무엇이어야 할 지, 주제넘지만 나름 생각해보고 있었습니다. 문화의 전당은 도청의 상징성을 고려해서 도청은 남기고 최근에 도청 옆의 별관에 대해 일부 보존으로 결론을 냈다고 합니다. 저는 도청은 보존되어서 기여할 수도 있지만, 제가 염두에 둔 미술관의 디자인이 이러한 도청의 상징성을 흡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도청의 일부를 내부에 품어버리는 스케일의 미술관도 생각해볼 수도 있겠구요. 이렇게 하면 1980년 뜨거웠던 5월의 금남로와 도청의 시멘트 냄새를 풍길 수 있지 않을까요. 한국의 도시건축에서 디자인이 참 어려운 점은 이미 전반적인 공간이 기능적인 현대적 건축소재 그리고 간판들로 현대적이면서도 개발국가적인 어색함이 넘친다는 것입니다. 한옥, 초가집의 전통건축은 자연과 닮아 있어서 편안함을 주는데 어느 도시에 가나 그 판에 박은 기능적/저가 건축물들은 마음을 거칠게 만들죠. 광주 역시 예외는 아니죠. 이러한 불리한 도시공간에서 어떻게 명소를 디자인할 것인지는 고민거리겠죠. 건물 몇 개만 멋지게 지어버리면 오히려 더 부조화할 수 있거든요. 해결책은 공원과 같은 곳을 두어서 일정하게 공간적인 격리를 하던지, 아니면 그 주변 공간의 거침 역시 하나의 삶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되 그것을 미학적으로 승화시킨 디자인이 도입될 수도 있겠죠. 지금의 문화의 전당은 아직은 조감도만 봐서 판단하기 어렵지만 어중간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개별적으로만 멋진 건물들이 들어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렇게 하면 비록 전남도청을 보존했다고 하더라도 그 지역이 한국의 나아가 세계의 랜드마크가 되기는 어렵지 않을런지요. 여러 사람들이 중앙 정부의 주도하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서인지, 그 미학적 완결성보다는 기능별로 건물들이 기획되고 개별적으로 멋진 디자인들이 들어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제 짐작이 틀리기를 바라지만요. (지금의 '디자인서울'의 접근 방식이 디자인을 고립된 시설물로 좁게 이해버리는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고려대 교환교수로 와 있는 커크우드 하버드 교수의 생각도 저랑 비슷해서 반가왔습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33418.html ) 

도심지에서는 살짝 비켜서있는 중외공원의 시립미술관과 민속박물관을 방문했습니다. 비엔날레관은 9월 개관을 위해 한참 준비중입니다. 저는 비엔날레관에서 시립미술관을 가느라고 헤맸습니다. 바로 뒤켠에 있는 것인데도 모르고 운전을 했으니까요. 비록 잘 챙기지 못한 제 탓이지만, 비엔날레관의 공간배치에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엔날레관은 중외공원의 외곽에 뻘춤하게 서있고 바로 인근엔 한국도시의 전형적인 기능적/개발국가적 건물들이 있죠. 아파트도 많구요. 비엔날레관은 비록 좋은 행사를 통해서 큰 기여를 했지만 비엔날레관은 그냥 큰 컨테이너 박스 같습니다. 이것이 보기 안좋다는 것이 아니고 공간배치라는 점을 고려할 때 제대로 미학적인 고려를 했다고 봐주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주변 공간과 전혀 안어울리니까요.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비엔날레관을 중외공원의 안쪽으로 옮기고 정원 등을 두어서 주변공간에서 일정하게 거리를 두는 것은 어땠을까 싶습니다. 거리를 두는 것은 좋은 생각은 아니지만 미술관이 공공재로서 품격을 갖추는 것은 필수입니다. 그래야 또한 대중들이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죠.

시립미술관과 민속박물관 모두 참 좋았습니다. 당연히 시립미술관에는 호남 미술의 대표성을 기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호남의 문화에 대한 애착이 깊은 저로서는 혹시나 실망할까봐 걱정도 있었는데, 기우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하정웅이라는 재일교포가 자신이 평생 모을 미술품을 대거 기증한 것이 시립미술관이 주요 소장 컬렉션이 듯합니다. 자체 구입 컬렉션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그렇지는 않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홈페이지에 찾아보니까 소장품전의 항목도 있네요. 혹이 커뮤니케이션 잘못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훌륭한 기부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동안 시립미술관이 발굴한 청년들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저야 잘 모르면서도 modern하다 싶으면 좋다고 수긍하는 편이어서 전시품들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전시관도 있었는데 마침 그림책의 그림들에 대한 것이 주제였습니다. 아이들이 그림도 그릴 수 있게 프로그램이 있더군요. 이런 참여프로그램은 다른 미술관들도 많이 하겠지만, 역시 보기 좋죠. 그리고 또한 이름을 내건 한과카페가 있는데 이곳도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떡이나 전통과자를 포함한 간식류 음식들도 아주 맛있었는데, 내부 디자인이 아주 편안하면서도 고전적인 미를 풍기더라구요.

시립미술관에서 민속박물관은 빤히 보이는 지척인데도 폭염 속에서는 아, 한숨 나오더군요. 고민도 되구요. 보통 민속박물관은 빤하다는 선입견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이왕에 온 것인데 하며 걸음을 떼었습니다. 하지만 전시물을 둘러보고서는 오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여늬 민속박물관과 뚜렷하게 달랐던 것은 아니지만, 남도의 가옥이나 살림살이, 먹거리, 생산(어업, 농업)를 잘 보여주고 있더군요. 특히 저로서는 먹거리 모조품들만 봐도 침넘어 갈 정도였습니다. 다른 지역에서는 생소한 갓김치, 황새치 젓(지역 사람들은 보통 황서리 젓이라고 합니다) 등은 그래도 호남문화권에 소속된 저로서는 반갑기 그지 없죠. 조그만 특별전시로 광주의 옛날 모습 사진들도 좋았습니다. 소박한 사진들이지만 애정이 깊은 사람에게 뭐인들 안좋겠습니까. 비록 광주를 포함한 호남이 거대 인권이지만 워낙에 지방이 힘들어지는 면이 있다보니까, 그런 지역적 색깔을 드러내고 계승하려는 노력 자체가 참 좋아보이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드디어 제가 광주에서 반드시 하고 싶은, 그리고 반드시 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드는 망월동 묘역, 지금은 국립묘지로 조성된 곳에 참배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학교다니면서 5월만 되면 기회들은 많았는데 미처 잘 챙기지를 못했습니다. 비록 뙤약볕이지만, 갈까말까하는 선택의 고민은 없었습니다. 광주와 함께 청년기의 감성과 세계관이 빚어진 세대로서, 이미 아주 늦어버린 일인데, 광주에 와서 망월동을 안가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꼭 고 윤상원의 묘지를 찾아보고 싶었습니다. 사실은 모든 희생된 분들 한분한분이 모두 윤상원이겠죠. 그래서 비석들 틈사이를 지나면서 각각의 이름을 눈에 담아두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중 묘역의 오른 편에 윤상원의 묘비와 조그마한 영정 사진을 보았습니다(아래 사진). 영혼결혼식을 한 박기순과의 합장묘더군요. 오래 사는 것은 때로는 많은 빛바램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년의 제 나이에는 참 어려보인다 싶은 30에 윤상원은 불꽃같은 삶을 하직했습니다. 그래서 윤상원은 여전히 아름다운 30의 청년으로 남아 있군요. 안중근도 불과 30을 몇 달 앞두고 '동양평화론'과 그 강렬한 필적을 남기고 떠났죠. 나이가 많다고 어른스러워지는 것은 아닌 듯합니다. 필부가 평생에 걸쳐서도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꺾어지지도 않는 나이에 이룩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그렇게 있네요.


그리고 망월동 구묘역으로 옮겼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메어지는 곳이죠. 광주항쟁의 계승자들이었던 여러 열사들이 본인들도 목메어 불렀을 그 망월동의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세월이 좋은 것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묻어두게 한다는 것이지요. 생각보다도 너무나 많은 열사들이 망월동에서 영면하고 있더군요. 20세기 마지막 20년, 한국사회가 박정희에 의해 각인된 개발국가의 껍데기를 깨기 위해 얼마나 처절하게 몸부쳤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돌아가지 않았다면 저처럼 생활인으로 살아갈 많은 학우와 민중활동가가 이제는 유명을 달리했다는 것이 아쉽고 허망합니다. 묘지들 중에는 제가 대학교 시절에 경험했던 전방입소반대 투쟁을 책임지기 위해 많은 학우들앞에 몸을 불에 태워 건물옥상에서 내던진 이재호 열사가 있었습니다. 김세진 열사와 더불어 두 분이 신림사거리 가야쇼핑입구 4층 건물 옥상에서 분신과 투신을 한 장면은 지금도 눈에 선하죠. 고작하여 저보다 한두해 선배에 불과했을, 지금 돌이켜 보면 어리디 어린 청년들이 그렇게 산화해갔습니다. 지금도 망월동 구묘역에 '반전반핵 양키고홈'이라는 당시 두 분이 외쳤던 구호가 플래카드로 붙어 있네요. 그러한 주장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몸을 살라서라도 헌신했던 청년들의 열정과 기백이 개발국가를 대체할 새로운 한국의 모델의 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립묘지가 성역화하면서 어떤 측면에서는 형식화된 면도 있는데, 망월동의 구묘역은 지금도 핏발이 서려있는 것 같습니다. 개발국가 이후의 한국의 정신적 가치는 그곳에 온전히 샘솟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518광주와 그 계승이 없었다면, 한국은 박정희의 개발국가라는 도구주의적 가치관으로만 경도된 깊이없는 사회였을 것입니다. 518광주에서 출발한 20세기의 마지막 20년은 민주주의, 민중의 무게를 쌓아서 비로소 추의 균형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망월동의 구묘역 그리고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열사들의 희생에 묵념드립니다. 비록 혈육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을 다 헤아릴 수 없겠지만, 그래도 고인들의 희생에 의해 한국사회가 올바로 가고 있다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위안을 찾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해질 무렵 망월동 국립묘지를 마지막으로 얼추 광주에서 가고 싶었던 곳들이 마무리됩니다. 역시 시간이 부족하더라구요. 못가본 곳들은 후일을 위해 저축해둔 심정으로 어둡기 전에 강진으로 출발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없을 때의 문제점은 어두울 때 길찾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광주를 중심으로 한 기행문도 생각보다 방대해졌습니다. 본업이 아닌 기행문에 너무 시간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걱정도 됩니다. 그래도 어떻하겠습니까. 현재의 시간은 지나가는 한때지만, 기록은 영원한 것이라서 이 기록의 마력에서 굳이 벗어나지 않겠습니다. 이미 양이 많아져서 강진-해남-진도로 이어지는 기행문은 새 판에 올려야 겠습니다. 시간도 새롭게 마련해야겠구요. 그래도 제가 기행문과 같은 감상문이 기질적으로 맞는 듯합니다. 독서 리뷰만 해도 골이 아픈데, 시간은 걸리지만 글은 쉽게 써지네요. 제가 연구를 하기는 하지만 로고스적이기 보다는 파토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보니 연구한답시고 머리를 고생시키니까 머리 빠지는 것을 걱정해야 한는 처지죠.  아마 저도 천상 남도 사람의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