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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관주의=주관주의, 비관주의=객관주의 도식은 맞지 않아요]

(2013.1.23)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주관적이죠. 동양인 얼굴을 연구한 조용진 교수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우뇌가 크고 좌뇌가 작는 북방계형이라고 하죠. 언어(논리)보다는 통찰(직관)이 강하다고 합니다. 상당히 역동적인 면이 있구요(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656112). 조용진 교수는 특징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너무 편향은 안좋다고 말하죠. 저도 같은 생각인데, 소규모의 단위로 사냥을 하는 시대라면 모를까 엄청난 인구가 사회를 모여서 살아간다면, 개인의 직관이나 통찰이 강조되기도 어렵지만(국민 모두가 다 각각이 한 통찰/직관이 있다고 자부하니까요), 그게 바람직하지도 않죠. 혁명과 쿠데타를 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반대의견을 가진 측도 끝없이 말로 설득해야 하는 시대에서 직관이 강조되면 그것은 독선이 되기 쉽죠. 시간이 걸리더라도 끝없이 말이 이루어지고 그 말들이 체계적으로 축적되고 이것이 사회의 컨센서스의 바탕을 이루게 됩니다. "나의 이 멋진 생각과 주장을 왜 이 멍청한 세상은 몰라주는가?" 이런 식으어서는 안되고, '어떻게 나의 생각과 주장을 보다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전략적 고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후자 쪽이 서구 사회가 걸어온 길이에요. 그게 과학이고 객관성인 것이죠. 서구 사회라고 하루 아침에 이게 된 게 아니죠.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을 마녀라고 처단해버린 게 불과 몇 백 년 전 일이니까요.

 

한국사회가 워낙에 주관이 강하다보니까, 대체적으로 '큰 소리 치는 경향'이 강하죠. '내가 쫙 살펴보니까', '내가 해봤는데' 하면서 대단히 '낙관적인' 성향이 많이 노출되죠. 그래서 낙관=주관이라는 도식이 쉽게 받아들여지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비관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 보다 객관적인 것처럼 이해되는 면이 있어요. 그래서 시니컬한 게 나름 또 지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오해됩니다. 비관=객관의 도식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죠. 그런데 엄연히 다른 범주의 개념들이기 때문에 그런 도식은 맞지 않습니다. 사분면을 짜면 [객관&낙관], [객관&비관], [주관&낙관], [주관&비관]이 모두 강합니다. 다만 대체적으로 한국은 워낙에 주관적이어서 [주관&낙관] [주관&비관] 두 가지가 주요 대립구도로 설정되어 있다고 봅니다.

 

사분면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와 관련해서 풀어보면, (1) 요 속담 자체가 [객관&낙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그 무너지는 것 자체가 모든 기회가 봉쇄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작은 확률이지만 희망을 찾을 수있다고 본다는 점에서 낙관적이죠. (2)  [객관&비관]도 있을 수 있겠죠. 하늘이 무너졌을 때 그 작은 틈은 확률적으로 너무 작다. 확률적 error 정도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죠. 중생대를 종결지은 유성의 충돌에 임해서 기존의 동물들이 살아날 확률이 그런 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죠. 저는 이 두 개의 해석이 다 유의미하다고 봐요. 똑같은 사고 지반을 갖고 있데 다만 확률에 대한 판단이 달라지는 것이고 그것은 어쩔 수 없죠. 그리고 양자를 서로 도움이 됩니다. 낙관이 확률을 좋은 쪽으로 계상하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면 비관은 확률을 보다 냉정한 쪽으로 낮추려는 성향이 있어서 양자가 적절한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면 그런 조직이나 사회는 대단히 지속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리고 양자 모두 [객관]이라는 공통 기반이 있어서 항상 대화가 가능합니다. 객관적인 것들을 찾는데 서로 긍정적이구요. 객관적인 것들이 확장되거나 심화됨에 따라 기대 확률을 서로 조정할 의향이 있습니다.

 

문제는 주관파들이에요. (3) [주관&낙관] '하늘이 무너진다니? 내가 이제껏 살면서 하늘이 무너진 것을 본 적이 없다. 턱도 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라고 경고 사인을 모두 무시해버리죠. (4) [주관&비관] '하늘이 지금 멀쩡하다고? 이것은 음모야. 사람들을 안심시켜서 아무도 피할 수 없게 '멀쩡해보이는 척해 보일 뿐이야. 아 무섭다. 다 죽었다.'라고 여기죠. 양자는 대조적이지만 사실은 손바닥 뒤집기 식이에요. 좌절을 경험한 [주관&낙관]은 바로 [주관&비관]으로 전환해버리죠. '모든 것을 잘 못 생각했어. 나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해. 내가 아는 모든 것은 잘 못된 거였어'라고 하기 쉽죠. 얼핏 보면 대오각성인 것같지만 실은 책임회피에요. 환원론으로 도피하는 것이죠. 그러다가 세상에 좋은 사건이 터지면 이렇게 반응해요. '역시 세상에 희망은 있구나. 내가 그동안 그 희망을 놓치고 살았구나' 이런 식이죠.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아주 쉽게 오가는 거에요. 그래서 주관파는 대게 조울증적 성향이 강해요. 좋을 때는 한 없이 낙관적이다가 실패를 맛보면 모든 과거를 부정하죠. 그러다가 또 좋으면 모든 과거를 긍정합니다. 객관파들이 과거를 데이터로 활용해서 기대확률에 반영하고자 한다면, 비관파들에게 과거는 그냥 에피소드에 불과하죠. 현재의 기분이 반영되는 것들에 불과해요. 이런 것은 미술심리학자인 지상현이 한국인의 전반적 심리기조를 조울증으로 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에요(http://desica.tistory.com/entry/한국인의-마음지상현-2011-강추). 대체적으로 한국인들에게서 주관파의 비중이 대단히 강해요. 주관파는 개인의 역할이 강한 분야, 예술같은 분야(옛날 같으면 순발력, 임기응변이 중요한 사냥 같은 것)에 강하죠.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지리하게 컨센서스를 형성해가는 데는 대단히 취약합니다. 한국인이 어제는 4.19를 지지했다가 오늘은 5.16을 받아들이는 심리적 quantum 도약은 한편으로는 역동성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의 미성숙성이죠.

 

한국 사회가 성숙해가기 위해서는 객관파가 보다 더 많아져야 해요. 원래 우뇌가 크건 작건 간에, 노력해야 할 것은 해야 해요. 그러다보면 적절하게 주관파가 갖는 장점도 소화할 수 있죠. 한국의 대중문화가 유일하게 한국어 기반으로 세계로 가는 것도 사실은 주관적인 성향 때문이에요. 주관파는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죠. 다만 주관파가 사회의 주요한 것이 되서는 안되겠죠.

 

유능한 리더는 객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적으로 [객관&낙관]의 유형이 많겠죠. 유능한 리더는 절대 '한 방'을 노리지 않죠. 끝없이 확률을 높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시스템을 다지죠. 사건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기 보다는 모든 사건을 다 데이터로 활용합니다. 나빠보이는 것 중에서도 긍정적인 단서를 보는 것을 잊지 않죠. 과거 히딩크 감독이 처음에 대파할 때 역시 주관성이 강한 한국의 언론이 5:0 감독이라고 하면서 진 결과만 볼 때, 히딩크 감독은 미디필더를 보다 전방 배치하면서 상대방 공격을 미드필드에서 압박하는 가능성을 시험하고 있었죠. [객관&비관]도 충분히 리더의 자격이 있습니다. 대게 위기에 대해 대단히 민감하기 때문에 위기를 잘 피할 수 있는 리더입니다.

 

반면에, 주관파는 대게 조직의 리더로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성공을 할 수도 있는데 지속가능성이 떨어집니다. 확률을 높이는 쪽보다는 '한 방'에 모험을 거는 성향이 강합니다. 그러다가 쪽박도 한 순간에 차죠. 객관파는 절대 그런 모험주의적 의사결정과 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객관&낙관] [객관&비관]의 좋은 예를 삼국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갈공명이 어쩌다 보니까 조조의 장군이 사마중달에게 허를 찔려서 성에 군사가 없는 상황에서 공격을 받게 됩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끝났다'하면서 좌절하면서 허둥텔텐데, 제갈공명은 성루에서 바둑을 두죠. 그야말로 절대절명의 위기이지만 그 와중에도 일말의 작은 확률을 타진하고 현실화시켜보려고 하는 것이죠. 어차피 그게 안되면 끝이니까요. 제갈공명이 바로 [개관&낙관]의 이상적인 케이스이죠. 어떤 상황에서도 second best, third best의 가능성을 타진하거든요. 사마중달은 비록 성을 공격 안하고 물러나서 비록 바보가 된 느낌을 주지만(그렇게 드라마틱하게 기술되죠) 역시 훌륭한 [객관&비관] 형의 리더입니다. 일거에 모든 것을 이루려고 모험을 하지 않는 거에요. 물러서서 기다리는 것이죠. 물론 그게 결과적으로 안 좋을 수도 있지만 확률의 입장에서는 그게 더 나은 것입니다.